믿음의 진정한 척도 / 로이드 존스
믿음의 진정한 척도 / 로이드 존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이 본문은 성경의 위대한 진리, 특히 바울 사도의 서신 곳곳에서 발견되는 금덩어리 같은 진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감동적인 말씀이다. 나는 오늘날의 교회와 세상이 바울 사도와 같이 이처럼 위대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말씀의 빛에 우리 자신을 비춰 보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이 본문에 나타난 모습이 오늘날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 곧 불길한 전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직시하려면 그런 태도를 취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두 구절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의 진정성을 가리는 일종의 ‘질산 테스트’와 같다고 생각한다. 질산 태스트는 가장 민감하고도 정교한 테스트이다. 정통성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성적인 동의에 그치는 정통성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정통성은 ‘질산 테스트’라고 일컬을 만큼 진정한 척도는 아니다. 또한 도덕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덕성은 진정한 척도가 될 수 없다. 또한 경험, 거듭나는 경험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은 ‘질산 테스트’라고 불릴 만큼 정교하고도 민감한 척도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척도는 이 구절의 말씀에 나와 있다. 본문은 그 세 가지 척도, 정통성, 도덕성, 경험을 보증한다. 본문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척도는 ‘삶에 대한 반응’이다. 곧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전인적인 반응’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진정한 척도는 ‘공습을 피해 방공호에 숨어 주변에서 터지는 폭탄 소리를 들으면서, 다음번 폭탄이 내 머리 위에 떨어져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는 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척도란 ‘궁극적인 것, 곧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는가?’하는 것이다.
전쟁터에 나간 젊은이의 관점에 빗대어 말하면, “삶과 죽음을 비롯한 모든 궁극적인 질문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런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를 비롯한 자연재해나 심각한 유행성 질환이나 질병이 발생해 시간과 영원, 삶과 죽음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기준이다.
‘그런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궁극적인 척도이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수많은 시련과 문제와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한다. 삶이 가장 암울하고 모질게 보이는 최악의 상황 앞에서 과연 우리도 그렇게 반응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진정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믿음의 정통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자신의 믿음을 굳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척도는 행위와 도덕성을 보증한다. 왜냐하면 지성으로만 믿는 것은 위기 앞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척도는 경험적인 요소, 곧 삶과 그 능력과 활력을 보증한다. 진리를 실제로 삶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바울처럼 반응할 수가 없다.
바울은 어떻게 그 모든 일을 능히 견뎌 낼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당한 시련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 박해를 받아도 ?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고후4:8-11).
복음이 영광스러운 것은, 그것이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과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을 그렇게 고백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복음의 영광은 우리의 타고난 성격에 의존하지 않는다. 심리학으로는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용기와 담력의 철학을 견지했다. 매우 유능하고 지성적인 그들은 인생과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또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며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원한다면, 어깨를 당차게 펴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자제력을 키우고, 엄격히 훈련하여 의지를 철석 같이 다지고, 절대 굴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스토아주의는 기독교와 정반대이고 아무 상관이 없다. 스토아철학은 체념의 철학으로서, 기독교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는 상황을 견디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단지 버티고 서서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극적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은 매우 적극적이다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상황을 견디거나 담담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다(롬8:37).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위대한 사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고백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모두 바울과 같은 기독교인이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기독교인이 인생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주 예수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바울도 이전에는 믿음으로 대처하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변했다. 그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그 무엇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에 관한 복음을 믿었다. 오직 이것만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삶 전체를 바라보게 된 이유이다.
우리는 인생의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하느라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삶을 깊이 바라보고, 또한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 준다. 나는 때때로 기독교 신앙을 마치 사람들을 비행기에 태우거나 높은 산 위로 데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모습으로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기독교인은 삶 전체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
“세상은 우리와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세상은 우리를 짓누르고 버겁게 하여 그 안에 파묻혀 길을 잃게 만든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그런 세상에서 끌어올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바울은 이 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먼저, 그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기독교인 됨으로써 시간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받는 가장 위대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바울은 ‘잠시’라고 말하고 나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고 덧붙인다. 바울은 시간을 영원이라는 방대한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무한한 시간, 백만 년이 거듭되는 장구한 세월을 떠올려 보라. 그것이 영원이다. 시간을 그런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그렇게 하면 시간이 어떻게 보일까? 찰나처럼 보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나 삶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면, 마치 그것이 제멋대로 구는 독재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추어 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지금, 오늘이라는 이 순간은 내일이 되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기독교는 시간의 문제를 해결한다. 기독교인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엡2:6). 기독교인은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나 영원에 속해 있다.
다음으로, 기독교인은 환난이라는 현실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바울은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겪은 혹독한 시련을 언급하고 나서 그는 그것을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고난은 그를 완전히 짓뭉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몹시 무겁고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는 시련 자체가 가볍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절대로 아니다. 그는 그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가볍다고 말한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중한 것’에 비할 때 그것은 지극히 가볍고 잠시의 것이었다.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기독교인이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다.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이란, 영원을 목격한 사람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에 그의 비밀이 있다. 그는 믿음으로 영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른 모든 것이 지극히 사소하고 가볍게 여겨졌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허리케인이 불어 닥치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또한 죽으면 모든 것이 단번에 끝난다. 따라서 바울은 그런 것을 위해 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다.’ 우리의 가정, 자동차, 재산 등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전2:9) 라고 말한다. 또한 베드로는 이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4)라고 표현한다. 인생의 허리케인이 연이어 몰아닥친다 하더라도, 하늘에 간직된 것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폭탄을 한데 모아 동시에 터뜨린다 하더라도, 우리의 유업은 영원히 견고하게 지속될 것이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일단 이 영광을 보고 나면, 그 무엇으로도 낙심하거나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게 된다.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런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 세상의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이 영광을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울이 말한 대로, 세상의 환난은 우리를 실망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가 본 영광, 곧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더욱 확고히 바라보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세상에 살았던 성도들의 비밀이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비밀이다.
하나님께서 이 악한 시대에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영광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세우시기를, 그리하여 모든 것이 절망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일 때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고후4:17)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로이드 존스, 「영광을 바라보라」, 1장 <목양연구>
산상수훈
/ 팔복(The Beatitudes)<로이드 존스>
마5:1-9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것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첫번째 세가지 복은 그의 필요에 대한 그의 인식의 측면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전환점을 맞이 합니다. 지금 전에 이어진 모든 것의 결과인
그의 성향, 경향 (disposition)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에는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자신을 볼때, 그 결과들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지금 여기서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때 반드시 보여져야만 하는 결과들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에는 분명한 논리적 전개가 있는 것을 봅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채워지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비로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궁휼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주된 강조점을 하는것 (doing) 보다는 되는것 (being)에 놓습니다.
우리의 행위보다는 태도에 무게를 더 둡니다.
산상설교 전반에서 우리 주님은 이 경향성, 성향 (dispositon)을 염두해 두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중에 행동에 대해서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전에 그는 인격과 성향 (disposition)에 대해서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것을 하기전에 어떤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할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인격(character)을 소유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어떤 타입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이런 저런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하고 여기저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우리의 행위들은 그것의 결과들입니다.
나의 기독교가 나를 지배합니다.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진리에 의해서 지배받습니다. 나는 삶니다, 그러나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안에서 사십니다. 그분이 나를 지배합니다. 내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나 자신을 나의 태도를 통제하는 자연인으로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닙니다. 그분의 성령이 나를 나의 삶의 바로 그 중심에서 통제합니다. 냐의 모든 활동의 근원에서 통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한 사람의 표면위에 있는 어떤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코팅의 종류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성 (personality)의 바로 그 중심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성경이 새로운 본성을 얻는 재탄생(rebirth), 거듭남 (born again), 새로운 창조 (new creation)을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의 존재의 바로 중심에서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모든 생각을, 관점을, 상상을 통제합니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동을 또한 통제합니다. 그의 모든 활동은 그러므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이 새로운 경향성 (disposition), 새로운 본성의 결과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하다’ 그것은 교만이 완전히 사라져있고 자긍심이나 자기를 의지하는 자세가 완전히 사라져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 심령이 가난해지는 길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애통함의 예]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5)
[애통함의 이유]
1) '죄'에 대한 참다운 인식으로 인하여 (나 자신의, 다른 사람의, 세상의, 그리고 죄의 본질 자체 때문에),
2) 뿌린 것에 대한 결과를 보지 못하는 일로 인하여 (사람의 인식과 주님의 인식의 차이..?)
“그리스도인은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삶을 영적으로 생각하며 그 속에서 죄와 죄의 영향들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가진 그런 생각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 때문에 그에게는 또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도 바울처럼 탄식합니다만, 동시에 그리스도와 장차 올 영광을 체험하기 때문에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Amplified 뜻풀이]
the meek: the mild, patient, long-suffering (게으름/나태함, 유약함, 친절함, 또는 타협주의와의 차이점은?)
[관련 성경구절]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 37:11)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온유란 두 가지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자세요, 또한 그런 나의 자세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를 아무리 나쁘게 말해도 그것에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이 그를 그렇게 좋게 생각해주며 잘 대해주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또한 인내하며 오래 참는다는 것을 뜻하고, 특히 부당하게 고통을 받을 경우에 그러한 것을 뜻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미 만족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6)
[관련 성경구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행복과 복된 상태’를 위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절대로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오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만족을 얻을(행복해질) 것입니다…… 의를 향한 열망은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요, 죄를 없이 하고자 하는 열망 입니다. 그것은 죄를 짓고 싶은 나 자신의 욕망에서 자유를 얻고 싶은 열망을 의미합니다.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지닌 최고의 소원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영적으로 나쁘고 해로운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영적 의욕을 무디게 만들어 결국에는 영적 침체를 일으키는 그런 것들까지도 피할 것입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이것은 참으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리고 목마르면서도 동시에 채움을 입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채움을 받으면 더 주리고 목마릅니다만 다시 채움을 얻고 만족을 얻습니다. 은혜에 은혜가 더해집니다. 이 일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축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6)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하는자, 온유한자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때 우리는 무력함, 연약함속에 영적 가난을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대 우리는 완벽한 인간으로 창조된 우리속에서 우리를 손상시킨 "죄"를 보게 됩니다.
자신을 염려하고, 자신에게 관심이있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을 주장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자신을 신성시 합니다. 이것이 개인의 나라의 문제의 근본 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해결책을 보고 있습니다.
용어를 잠시 봅니다. "의" 에 굶주린자. "의"를 갈망하는자
"의' "갈망" ' 축복" "행복" 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세상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것을 갈망하며 계획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행복" " 축복"을 우선적으로 갈망하고 찾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축복, 행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갈망하지만 그것을 항상 놓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축복은 항상 직접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을 추구함으로 오는 결과입니다.
환자가 있습니다. 고통을 겪는 그 환자는 고통을 없애는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갈망하고 찾고 있습니다.
의사가 그 환자의 고통의 원인보다 그 고통 자체를 덜어주는 방법을 찾고 있다면 좋은 의사가 아닙니다.
고통은 질병으로 주의를 집중케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증상' 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궁극적으로 다루는 것은 '질병' 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입니다. 그 원인은 '죄' 입니다.
우리가 축복, 행복, 경험을 직접적으로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교회안에서 직접적으로 축복, 행복, 경험을 구하지만 그것을 놓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행복하고 축복받길 원한다면 제일 먼저 "의"를 구해야 합니다.
"의' 를 구하는 것은 죄의 모든 형태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을 분리시킨 그 죄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것과 은혜위에 은혜를 받는 거룩의 진보로서의 의를 받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의 최조의 부모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의로운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롭게 창조되었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서 죄와 사탄의 지배아래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임금을 따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 임금의 힘 ,죄의 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을 수 없으나, 좋아하고, 원하는 그 죄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약할 수 도 있습니다. 의에 목말라 하는것은 끔찍한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자기 자신"으로 부터 자유롭게 되는 갈망을 말합니다. 자기관심 ,자기자랑, 자기보호... 모든 싸움의 원인인 "자기자신"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더욱 알기를 원하고 ,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님 ,성령님과 교제하기를 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분과 동행하는 것을 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닮기를 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보고, 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묘사를 보고, 성육신의 상태로 이 지구에 있을때 그 분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순종했던 그 분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 분의 다른 사람들을 향한 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그분의 친절을 보는 것입니다. 그 분의 동정을 보는 것입니다. 그 분의 민감한 본성을 보는 것입니다. 그의 원수들을 향한, 그들이 그 분에게 했던 모든것에 대한 그 분의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거듭나고 새로운 형상으로 변화되어져가는 것을 묘사한 그 분을 보는 것입니다. 의에 굶주리고 갈망하는 사람은 그 분처럼 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최고의 갈망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복을 받고 행복을 얻고, 채워집니다. 배부르게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관련 성경구절]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8:12)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특별히 하나님 자신에게 적용되는 형용사입니다. ‘은혜’는 죄 자체에 대한 것인 반면 ‘긍휼’은 죄로 인하여 생긴 비참한 결과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측은히 여기는 감정에 행동이 합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한때 내가 처했던 그런 어두움의 자리에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계속해서 그런 형편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참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죄는 미워도 죄인은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용서함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체험했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관련 성경구절]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청결한 마음의 예]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내 안에 정직한 새 영을 넣어 주십시오”(시 51:10)
“주님, 주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의 진실하심을 본받아서 살겠습니다. 내가 한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시 86:11)
“청결한 마음이란 곧 나뉘어지지 않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또한 그것이 우리 삶의 최고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오직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성경에서 가장 우리를 엄숙하게 만드는 말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관련 성경구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인간의 모든 문제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죄 때문입니다. 개인들 사이이든, 여러 그룹들 사이이든, 나라들 사이이든, 인간의 탐욕, 이기심, 자기중심성이 모든 문제와 불화의 원인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에 크게 필요한 것은 바로 ‘화평케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낮추셔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의 모든 것이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평케 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 자신과 그의 아들이 하신 일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관심으로부터, 자기주장으로부터 완전히 구원함을 받음을 뜻합니다. 그는 자신을 기꺼이 낮추는 사람이요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므로 필요하다면 고난마저도 감수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10)
“성경은, 까다롭고 불쾌하게 행동하거나 자기 의 또는 어리석음 때문에 불필요한 핍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합니다. 의롭다는 것, 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곧 주님을 닮은 것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복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의인은 정죄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모습과 삶 자체가 사실상 그들을 정죄하고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쪼그라드는 느낌을 갖게 되고 기분이 나빠져서 의인을 미워하게 됩니다. 의인이 핍박을 받는 것은,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1-12)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권세자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 자기들이 드디어 주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할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강해-
거짓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특징/로이드존스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을 길을 걸어가야 할 절대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서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설교 시에 침묵하는 진리들이 무엇인지를 폭로하였는데 그것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드러내는가?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에는 말씀이 거의 없다. 그의 메시지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그의 메시지는 교리를 특수화하여 하나하나 상세하게 열거하지 않는다. 그는 교리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매우 모호하다." "성경 말씀은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의 일관성이 없고 모호한 설교 덕분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설혹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성경을 조화있게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하늘의 빛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뱀의 혀가 둘로 갈라져있는 것처럼 한 입으로 두 말을 합니다. 어떤 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설교하다가 어떤 때는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의 특징입니다. 이와 같은 전제를 말한 후 로이드 존스는 짓 선지자의 메시지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습니다. 1)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것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다.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곧 사랑이다." 2) 거짓 선지자는 심판과 지옥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이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반세기동안 최후 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3) "거짓 선지자는 죄의 사악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는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4) 거짓 선지자는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의 마음이 검은 것을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은 그저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된다. 하지만 청교도나 웨슬레나 조지 휫필드나 기타 위인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 몇 주, 몇 개월간이나 고뇌하게 했다." 5) 거짓 선지자는 성결한 생활에 대해 침묵합니다. " 거짓 선지자는 산상수훈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성결, 성경적 성결에 관심이 없다. " 6) 거짓 선지자는 자기 기만의 위험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 거짓 선지자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안한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방해한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항상 ' 예수를 바라봐야 ' 하고 여러분의 죄를 찾기 위해 자신을 보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자신을 시험해보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라! (고후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놓는다 그들은 청교도들과 18세기의 위대한 지도자들 곧 웨슬리나 휫필드,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자기 검토와 죄의 의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기독교 생활을 추천한다. "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정통 교단에 속해있고 아무리 큰 교회를 목회 한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것을 빠트리고 설교하는 자는 누구든 거짓 선지자입니다. - 개혁주의 마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