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두(1:1-2)
처음 두 절은 로마시대의 전통적인 서신의 서두를 따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편지를 시작하는 일정한 형식이 있듯이 로마 시대에도 편지가 일정한 형식의 서두로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A가 B에게; 인사합니다 라는 형식이다. 그 다음에는 대개 상대방의 건강과 안녕을 비는 기원이 뒤따르고, 때에 따라서 자기들이 믿는 신에 대한 찬사가 뒤따른 후, 편지의 본론이 나온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이런 형식을 사용하되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어떤 부분을 상당히 확대시킴으로써 그만의 독특한 서신의 형식을 발전시켰다. 이 서두에 의하면. 편지의 발신인은 바울과 디모데이다.
바울의 것으로 알려진 신약의 총 13개 서신중에서 7개 서신이 공동 발신인으로 되어 있는 것은 흥미롭다.2 이것은 당시의 서신으로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사도 바울이 그 서신을 주로 기록했지만. 그것들을 자기 개인적인 것으로보다는 함께 동역하는 일군들, 혹은 교회의 산물로 간주했기 때문에 공동 발신인으로 했던 것 같다. 수신인은 몇 가지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를 ,혹은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신실한 형제들 ,혹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이다. 사도 바울이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이 편지가 읽힐 것이라고 기대한 것을 보면(4:16), 수신인을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과 (그 이외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이 정확하게 사도 바울이 의도한 것인지는 확정짓기 어렵다. 그럴지라도 수신인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알고 그 안에서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려는 신자들인 것은 확실하다.
2.감사(1:3-8)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께 대한감사는 바울과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할 때 마음에 품은 심정을 나타낸다. 감사의 대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다. 감사의 대상을 이런 방식으로 밝힌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감사가 저자의 마음속에 늘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는 언제나 감사해 한다.(3절)
그러면 무엇이 감사한가? 4절부터 감사의 이유가 소개되고 있다. 바울이 그렇게 감사하는 것은 바울 일행이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전해들은 두 가지 소식 때문이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가진 믿음에 대한 소식이고,3 둘째는 그들이 모든 성도에 대하여 품은 사량에 대한 소식이다. 그러니까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바울 일행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게 만든 것이다. 5절은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믿음과 사랑을 가지게 되었을까에 대한 대답이다. 그들은 하늘에 그들을 위하여 간직된 소망을 통하여 믿음과 사랑을 갖게 되었다. 소망이 간직되었다는 말이 즘 어색할 수 있는데, 이 말은 그들이 하늘에 그들을 위하여 준비된 축복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바라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늘에 간직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그들에게 약속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소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앞으로 완성시킬 것을 약속하신 구원의 거룩한 은혜로 해석된다. 이 참된 소망은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도 바울은 여기서 믿음, 소망, 사랑의 공식을 다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에게 전파된 복음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이 소망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복음이 사람들에게 소망을 가르쳐 주고, 그들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을 가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한 것은 골로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즉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이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 알게 된 날부터 그들 안에 있는 복음은 열매를 맺고 성장해 왔는데, 이것은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6절).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에 복음이 전파되면 하늘에 그들을 위하여 간직된 소망이 선포되어야 하고,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얻고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품어야한다.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된 것은 에바브라에게서 배운 결과이다. 그는 골로새 출신이거나 골로새에 거하는 인물로서, 아마 그가 골로새 교회를 세운 듯하다. 그는 바울 일행의 사랑을 받는 동역자로서,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군이며, 성령 안에서의 그들의 사랑을 바울 일행에게 전해 주었다. 에바브라에 대한 사도 바울의 칭찬은 그의 가르침의 권위를 힘있게 뒷받침하는 말이다. 아마 다양한 이단적인 사상의 공격을 받는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에바브라에게서 배운 복음의 진리를 굳게 쥐고 흔들리지 말 것을 은연중에 당부하고 있는 듯하다(7-8절). 이상이 사도 바울 일행이 기도할 때마다 골로새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내용과 이유이다. 이 내용을 기도로 구성해 보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저희가 골로새의 형제들의 믿음과 사랑을 인하여 늘 감사드리나이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동역자요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군인 에바브라를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받고,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쌓인 거룩한 은혜를 알고 소망하게 되었나이다.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은혜를 알게 된 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게 되었나이다. 복음 진리가 전파되는 곳마다 그 은혜가 전파되고 그것을 듣는 이들이 믿음과 사랑을 가지게 되는 일이 언제나 있었는데, 골로새에서도 그런 일이 있음을 저희가 에바브라를 통하여 듣고, 과연 그들이 진리의 복음을 듣고 하나별의 은혜를 깨달었음을 또한 저희가 확인하나이다. 주께서 골로새 교회에 베푸신 이 모든 구원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나이다. "
3.기도(1:9-12)
9절부터 20절까지는 하나의 긴 문장이지만, 내용상 9절부터 12절까지가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바울 일행의 간구이고. 13절부터 20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선포이다.4 바울 일행은 에바브라를 통하여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 감사를 드릴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기도의 내용은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즉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론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는 것이었다. 여기 지혜와 지식은 어떤 신비한 계시가 아니라 훨씬 실천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로 사람이 인생에서 당하는 여러 일들 가운데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의미한다(9절).
그러면 그렇게 깨달은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10절부터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 합당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과 그 결과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10절 상반절).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바울은 그런 생활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모든 일에 선하게 노력하여 그에 합당한 선한 결과를 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장해 가며(10절 하반절), 둘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부터 힘을 얻어 기쁨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11절). 11절 마지막의 '기쁨으로 라는 말과 12절 서두의 감사하면서' 라는 말을 어떻게 연결할지에 대해서 해석자들에 따라 다른 의견들이 제시되지만, 어느 것을 취하든지 의미상 총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11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인내와 참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어려움을 전제하므로, 그들이 당한 어려움을 감사하면서 견디어 내라는 의미로 연결시키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감사하고 있는 내용은 빛 안에서 그들에게 성도의 기업의 몫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이다(12절). 여기 성도의 기업의 몫은 위에서 말한 하늘에 쌓인 소망 을 상기시킨다. '기업' 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도들이 받을 축복의 지상적인 모형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하여 준비하신 거룩한 축복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에 감사하면서 참음과 인내를 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쁨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라고 밝히고 있다. 10절 후반부터 12절까지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서 기도를 재구성하면 아마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은혜를 베푸신 아버지, 그들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지식으로 아버지의 뜻을 충만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매일의 삶에서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살며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게 하시옵소서. 그렇게 하려면 그들이 모든 선한 노력을 기울여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힘을 얻어 그 힘으로 기뻐하면서 참고 견디며, 성도의 기업을 얻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겠나이다. 그들의 생활에 이런 열매가 풍성하여 그들의 소망에 합당하게 살게 하시옵소서."
4.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법의 크신 능력(1:13-20)
13절은 12절에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설명한다. 즉 12절의 해설로 이해하면 된다. 지금까지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기도에서는 ‘너희'로 이야기하던 바울이 여기서부터는 '우리'라고 말함으로써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서 골로새 그리스도인들과 바울 일행이 하나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기신 것이다(13절). 이것이 12절의 몇 가운데서'의 의미이다. 과거에는 흑암의 권세 하에 있었지만, 이제 우리가 옮겨진 아들의 나라는 빛의 나라이다. 여기 두 세력의 대립이 있다. 하나는 흑암의 권세이자 어둠의 영역이며 , 다른 하나는 아들의 나라이자 빛의 영역이다. 그러면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알려면 그 아들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실은 그 아들 안에서 우리는 구속 곧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이다(14절). 즉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실은 우리의 속죄와 구원이다. 그러면 그가 어떤 분이기에 우리가 그 안에서 속죄의 큰 은혜를 받는가?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분이며, 피조물이 있기 이전에 나심으로써 피조물 위에 높이 계신 분이다(15절)5. 왜냐하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하늘에 있든 땅에 있든,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또한 그를 위하여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의 모든 권세도 마찬가지이다(16절). 여기서 사도 바울이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모든 권세를 장구하게 나열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지고의 위치에 대항하는 어떤 가르침에 노출되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그 가르침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많지만, 어느 시대 어느 그리스도인도 그런 영적인 전쟁을 치루지 않은 경우가 없으므로 이 구절은 오늘날의 상황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며 만물이 그의 안에서 유지되고 있다(17절). 이 세상이 지금 이와 같은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현재와 같이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는 또한 교회의 머리로서 죽은자 가운데서의 부활의 첫 열매이다(18절). 지금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속해 있는 그 교회의 머리는 세상의 종교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나 이스라엘의 선지자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주 만물의 지배자이며 모든 피조물의 존재의 목적인 그리스도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창조의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는 데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는 만물의 (혹은 교회의)근원이며, 부활의 첫 열매이다. 이렇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만물 위에 지고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의미를 간명하게 표현하지만, 그 내용은 말할 수 없이 심중하다. 죄인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를 만물의 으뜸으로 만드는 신성한 일이기도하다.
창조의 그리스도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이렇게 아무런 구별 없이 한 호흡으로 설명되는 이유가 이제 드러난다. 19절과20절은 유명한 난해 구절 중의 하나이다.하지만 의미가 반드시 모호한 것만은 아니다. 19절이 20절과 바로 연결되는 점으로 보아, 이 구절은 구원의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이룬 화평으로 인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다(20절).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온 천지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창조의 주인이요 교회의 머리이시다.
온 우주 위에 높이 들린 그리스도의 지고의 존엄에 대한 이 장엄한 단락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만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창조의 주인이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피로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되는 대단원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그리스도의 지고의 위치가 힘있게 천명되지만, 그것은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큰 구원과 회복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5.권면(1:21-23)
이제 이런 우주적 화목이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지는 의미가 설명된다. 다시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이 대상이 된다. 21절은 그들의 이전 상태를 설명한다. 그들은 이전에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인 위치에 있었는데, 이런 사실이 그들의 악한 행실로 드러났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되었는데. 이는 그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함이다(22절).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유지해야 할 어떤 상태가 있다. 즉 그들이 밀음에서 굳세고 견고하며, 에바브라에게서 배운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어투는 완전한 조건이라기 보다는 너희가 앞으로 그렇게 될 것으로 믿지만, ‘너희가 ‥‥ 한다면' 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너희가 받은 은혜로 인하여 그런 결과에 도달할 것으로 믿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너희는 믿음에 굳건하게 서며,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노력해야 한다 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지만 사람은 또한 그 은혜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바울은 복음이 한쪽 구석에 숨어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온 세상에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전파되었다는 것과 자신도 그 복음 전파의 일군이 되었음을 밝힌다.
6.요약
이 편지의 서두에서 사도 바울 일행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은혜를 자신들이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를 알리며, 또한 자신들이 그들을 위하여 어떤 내용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지를 알리고 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지금 살아 있다면, 여전히 그는 위에서 살펴본 그 간구의 내용으로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했을 것이다. 이 기도는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알려 준다. 하지만, 오늘날교회에 대하여 사도 바울 일행이 했던 것과 같은 감사를 얼마나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많은 경우에 교회들은 하늘에 쌓인 소망보다는 현세의 소망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세속화와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이 그런 경향을 많이 부추겼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편지의 감사의 내용으로 감사할 수 있는 교회가 있다면 정말 감사할 일이다. 우리는 교회를 위하여 그렇게 간구해야 하며, 또한 교회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각자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으로 인식되었는지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만물 위에 높이 계신 분이며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존재하고 또한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 세계의 강대국의 흥망성쇠도, 인간의 생사도, 자연의 이치 등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권능 아래 있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분이시다. 이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의 의미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을 생각할 때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진리이다.
주(註)
1. 골로새서의 저작자가 사도 바울이 아닐 것이라는 이론이 널리 주장되고 있지만. 그 근거가 사도 바울의 저작을 부인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으므로 이 글에서는 사도 바울의 저작을 견지한다 2. 고린도전서 '바울과 소스데네, 고린도후서 '바울과 디모데', 갈라디아서 '바울과 및 함께 있는 모든 형제'. 빌립보서 '바울과 디모데. 골로새서 '바울과 디모데' . 데살로니가전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데살로니가후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빌레몬서 '바울과 디모데’ . 3.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볼 수도 있다. 4. 어떤 신약 학자들은 15절부터 20절까지를 별도의 단위로 간주한다. 즉 골로새서의 저자가 초대 교회에 있었던 일증의 찬송을 여기에 삽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네슬-알란드 헬라어 신약성경 26판은15절부터 20절까지를 아예 별도의 문단으로 독립시켜서 기록해 놓았다(UBS헬라어 신약성경 3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보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야 이 본문이 잘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5. 한글성경에 '먼저 나신 자로 번역된 ' ‘프로도토코스’라는 원어는 신학적으로도 논란이 많은 표현이지만, 이 구절은 잠언 8장 22절부터 31절의 지혜의 의인화와 관련시켜서 이해하면 철 것이다(참. 시 8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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