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완전함”에 대하여
“완전함”에 대하여
히브리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한 가지 개념은 “완전함”(perfection)의 개념이다. “그리스도교적 완전함의 이해는 히브리서 해석에 있어 중요하고 또한 필수적인 것이다”(O. Michel).
본서에는 ‘완전’(perfection)을 뜻하는 단어로서, 동사형이 9회(2:10; 5:9; 7:19, 28; 9:9; 10:1, 14; 11:40; 12:23), 명사형이 3회(7:11; 12:2; 6:1), 형용사형이 2회(5:14; 9:11) 나온다.
그리고 3회는 그리스도를 완전케 함에(2:10; 5:10; 7:28), 4회는 구약 제사의 불완전성을 표시함에(7:11, 19; 9:9; 10:1), 3회는 그리스도의 성도를 온전케 하는 사역에(10:14; 11:40; 12:23), 그리고 1회는 성도가 나아갈 대상에(6:1), 1회는 믿음을 온전케 하는 자로서의 그리스도에(12:2) 각각 사용되어 있다.
이 “완전함”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본서의 배경과 목적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친다. τέλειος와 그것의 파생어들은 고전 헬라어와 70인역, 필로, 신약의 여러 문서들 특히 누가복음-사도행전, 요한문서, 바울, 야고보, 그리고 초대그리스도교 문헌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제 본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완전함’의 개념에 대한 연구사를 살피고, 그 바른 뜻을 고찰하고자 한다.
1. 연구사
완전함의 일반적인 이해는 신약에 나오는 다른 경우에서처럼 “도덕적인” 완전의 개념에서 이해하는 것이었다. 즉 본서에 나오는 “완전함”의 용어들은 신약 다른 곳에서처럼(cf. 마 5:48) “도덕적으로 완전함”(moral perfection)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의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고 케겔(J. Kögel, 1905)은 소위 “형식적”(formal) 해석이라 불릴 수 있는 입장을 세워 보려 했다. 그는 고전 헬라 문서들에서 τελειοῠν의 용례들을 분석하고 결론짓기를 히브리서에 9회 나타나는 이 동사는 ‘어떤 특별한 내용을 갖지 않는 일반적인 용어’라고 했다. 그것은 순전히 형식적인 표현이며, 다만 그것의 문맥과 목적어에 따라 뜻이 결정이 되는 단어란 것이다. τέλειν이 ‘시작이나 중간이 아닌 끝’에 강조를 두고 있는 데 비해, τέλειος에서 유래한 τελειοῠν은 단편적이 아닌 ‘전체적인 것’(wholeness), 즉 질적인 온전함에 강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τέλειος는 70인역에서 해당하는 히브리어들에서 모두 ‘죄 없음’보다는 인격의 ‘온전함’을 의미하고 있다. 신약에서 이 동사는 τελεῐν과 같은 의미로 ‘끝마치다’는 뜻으로 사용된 예도 있으나(눅 2:43; 요 4:43; 5:36; 17:4; 행 20:24), 요한일서(2:5; 4:12; 4:17-18), 야고보서(2:22) 같은 데서는 어떤 것을 질적으로 완전케 함을 가리켜 있다. 누가복음(13:32), 빌립보서(3:12)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특히 한 인격과 관련되어 절대적으로 사용되어 있다. 이같이 이 단어들은 그 어디에서도 도덕적인 완전을 뜻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케겔과 같게 그리고 또한 다르게 미첼(O. Michel, 1935)은 히브리서의 ‘완전함’을 연구했다. 그는 케겔의 연구를 대부분 인정하면서, 그러나 케겔과는 달리 주로 이 단어의 70인역에서의 용례를 연구했다. 그리고 그는 결론짓기를 “성서적 개념들은 언제나 구체적인 언급들을 소지하고 있으며, 헬라적 추상화나 형식주의에 대립한다”고 했다. 히브리서는 70인역과 후기 유대교에서 발견되고 δίκαιος와 τέλειος 사이의 연결을 물려받았으며 이 어휘를 형식적으로나 중성적 의미로 사용치 않는다. 그리하여 본서의 용례에는 형식적인 의미(outer, vocational perfection)와 도덕적인 의미(inner, personal perfection) 모두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순종은 도덕적인 의미의 완전함을, 그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 되심은 형식적인 의미의 완전함을 나타낸다.
케제만(E. Käsemann, 1939)은 이와 달리 영지주의 입장에서 이 개념을 해석했다. 그는 만데아 문헌, 발렌타인 영지주의 문서, 솔로몬의 송시, 헤르메틱 문서 등에 유사한 어휘들이 사용되었음을 발견하고 결론짓기를 히브리서의 완전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화’(glorification) 또는 ‘하늘 영역으로 들어섬’과 유사하다고 했다. 그 역시 케겔처럼 이 용어의 도덕적인 해석을 반대하고 형식적인 해석을 취할 것을 주장하나, 그것을 특히 영지주의의 구속자 신화의 빛 하에서 보려 한다. 그는 미첼처럼 70인역이 본서의 완전사상 이해에 배경이 된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영지주의가 된다고 보며, 그리스도가 고난 후 완전케 되심은 영지주의의 구속자가 자기 임무를 마치고 그가 나왔던 하늘로 돌아간 사실과 맞먹는다고 본다. 그리스도만이 온전케하는 자며, 성도들은 그와 연합함으로 해서 온전해짐을 얻는다. 그래서 ‘온전한 자들’(5:14)이라 불린다.
헤링(Th. Häring, 1920)은 이와 달리 이 개념을 제의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려 했다. 히브리서에서의 완전은 ‘온전한 헌신’(봉헌)을 뜻하며,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했으므로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의 논증에 나타나는 τελειοῠν, καθαρίζειν, ἁγιάζειν의 병행은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과임을 보여주며, 이 가운데 τελειοῠν은 다른 두 단어들 이상으로 형식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헌신’(to consecrate, weihen)을 의미한다.
리겐바흐(E. Riggenbach, 1923)는 이런 헤링의 견해에 반대하고 히브리서에는 형식적인 완전과 동시에 도덕적, 종교적 완전도 언급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70인역 어디에서도 헤링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헌신’의 일반적인 의미는 나와 있지 않으며, 옛 계명하에서도 정결함과 거룩케 함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9:10, 13f.), 구약의 제도하에서는 온전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7:11, 19; 10:1) ‘헌신’의 뜻이 아닌, 오히려 형식적인 ‘무흠’의 뜻, 도덕적인 ‘무흠’의 뜻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본서를 해석하는 자는 수신자들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지금 유대교의 제사제도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함으로 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끊으려고 하는 위험에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유대교가 노력했으나 얻지 못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도덕적으로 온전함이 입증되셨고 그리하여 그의 사명을 완벽하게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디벨리우스(M. Dibelius, 1942)는 이런 리겐바흐의 주장에 반대하고 신비종교의 빛 하에서 이 개념을 해석하려 한다. 그는 히브리서를 한 특수한 공동체에게 주는 메시지로 보려 하는 것은 이 서신의 신학적인 이해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라 보고, 본서를 하나의 신학적인 목적을 지닌 글로 본다. 10장 32-34절 같은 구절들은 실제 있었던 상황을 서술한 것이 아니고 역자가 이런 교회에 예상되는 일반적인 경험들을 가지고 10장 34절의 ‘보다 낫고 영구한 산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본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권면들은 종말적인 환난이 예상되는 그리스도의 교회들 일반에게 주어진 것이다. 저자의 목적은 신학적인 것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하늘과 땅을 잇는, 하나의 숭고한 신비-제의’(mystery-cult)의 형식으로 나타내려 했다. 진정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늘의 영원한 성소로의 길을 여신다. 그는 친히 이 의식을 위한 시세(initiation)를 받고 그리스도인들로 그를 따를 수 있게 하여, 이 제의에서 그들 자신이 성별되게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을 역사 가운데서 이루셨고, 모든 신자는 그러므로 해서 하늘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실제로 가까이 나아가게 된 것이다.
스픽크(C. Spicq, 1953)는 그의 히브리서 주석에서 ‘완전’의 어휘들은 저자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그리고 그들의 결과들을 대조시키는 중요한 도구로 보았다.
오직 새 언약과 그것의 결과들만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완전하게 만들 수 있다.
신자들을 ‘손전한 자’(5:14)라 할 때 그것은 ‘그들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 그들은 의로우며, 그들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영적인 생활에 있어 최고의 발전단계에 도달한 자들이며, 이런 완전성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과 보다 정제된 도덕적 양심의 결과이다. ‘제사직을 온전케 함’(7:1)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허용하는 것이며, 이리하여 새 언약은 옛 언약이 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한다: 양심을 순결케 함, 내적인 성결, 하늘에 올라감 등. 이런 완전함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이상적인 제사직의 수행을 통해서만 신자들에게 가능해진다. 이리하여 스픽크는 케겔의 견해를 많이 따르면서도, 도덕적, 제의적, 종말론적 입장을 거부하지 않는 이른바 종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데이(L. K. K. Dey, 1975)는 히브리서의 ‘완전함’을 필로의 배경에서 논하고 있다. 그는 히브리서가 아들로서의 예수를 천사, 모세, 아론, 레위, 그리고 멜기세덱과 대조, 혹은 관련시키는 것을 보고 이를 어떤 한 종교적 세계에서 나온 산물, 즉 필로의 사상체계에서 오는 것으로 이해한다. 천사, 모세, 아론, 레위, 멜기세덱 등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으며, 모두 열등한 계시와 이차적인 질서의 종교상을 제시한다. 그들은 모두 현상계에 속한 인물들이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완전함이란 바로 이런 현상계에 반대되는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써, 완전함은 이들을 초월하여 하나님께로의 직접적인 나아감, 이데아 세계에의 참여를 뜻한다. ‘완전’이란 ‘소피아’(Sophia)의 인도와 ‘로고스’(Logos)의 중개를 초월하는 것으로써, 아론, 모세, 멜기세덱은 모두 저마다 다른 완전함의 단계를 나타낸다고 본다. 가르침과 실행을 통해 완전함에 이르는 자들과 본래부터 완전한 자들 사이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로고스를 상징하는 아론의 죽음을 로고스의 끝, 진리(truth)로 보고, 진리를 로고스의 완성으로 본 필로와 사상의 맥을 같이 한다.
2. 본문 고찰
본 ‘완전함’의 연구사는 우리로 하여금 히브리서의 완전함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19세기까지 도덕적인 측면에서 이해되던 ‘완전함’은 20세기에 이르러 ‘형식적’, ‘제의적’, ‘영지주의적’, ‘신비적’ 측면에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들 입장의 공통성은 가능한 그것을 도덕적인 입장에서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과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완전함, 총체적인 완전함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런 예비적인 지식을 가지고 “완전함”의 어휘들이 나오는 본문들을 고찰해보자.
1) 2:10; 5:9; 7:28
이 구절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온전케 했다는 내용을 갖고 있는 구절들이다.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2: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5:8-9),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7:28).
이 구절들에서 “온전케 함”을 도덕적인 완전함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본래부터 완전한 자이시며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온전케 하심”은 무엇이 부족해서 온전케 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명의 완벽한 성취(vocational perfection)를 하셨음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시고 고난을 통하여 인류 구속의 사역을 온전히 성취했다는 것이다.
2) 7:11, 19; 9:9; 10:1
이 구절들은 모두가 구약제사 제도의 불완전성을 표시하는 구절들이다. “레위 계통의 제사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7:11);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7:1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9:9);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10:1). 이 구절들에 나오는 “온전케 함”을 도덕적인 의미로 해석할 때 뜻은 이상하게 되며, 제의적인 의미로 성별 또는 헌신을 의미하게 될 때는 사실과 맞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구약의 제사 제도하에서도 성별, 혹은 헌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전케 함”을 완전한 속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때 그 뜻은 가능케 된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모두가 불완전한 것이기에 인간을 완전한 속죄에 이르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회적이고 반복적이고 불완전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서는 인간을 완전히 속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회적이고 영원하며 완전하기 때문이다. 모세를 통해, 아론을 통해, 대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불완전했다. 보통사람은 성소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믿는 자는 누구나 은혜의 보좌에 언제든지 담대히 나아가게 된 것은 완벽한 헌신, 완벽한 교제, 완벽한 나아감을 뜻한다.
3) 10:14; 11:40; 12:23
이 구절들은 모두 성도를 온전케 함을 언급하는 구절들이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14);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1:40);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12:23). 여기서 말하는 “온전케 함”은 도덕적으로 온전케 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죄가 정결케 된 자요, 거룩하게 된 자요, 의로운 자들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신약의 성도들이 아니고서는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여기 “온전함을 이룸”이 도덕적인 완전함이 아닌, 구속적인 완전함, 완전한 구원, 더 좋은 세계(더 나은 본향)에 들어감을 의미함을 보여준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신약의 성도들을 위해 더 좋은 구원이 예비 되고 구약의 성도들은 이 구원에 초대되었으므로, 신약의 성도가 없이는 구약의 성도들은 이 더 좋은 구원에 이르지 못할 뻔한 것이다.
4) 6:1
이는 성도가 나아갈 목표물을 말하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6:1). 이는 유대교의 자리에서 떠나 그리스도교로 나아가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교는 성숙한 종교, 완전함의 종교란 것이다.
5) 12:2
이는 믿음을 온전케 함에 관해 말하는 구절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2). 여기 “믿음의 주”는 믿음의 선구자를 뜻하며 “(믿음을) 온전케 하는 자”는 “완전한 믿음을 가진 자”(the one in whom faith has reached its perfection)를 뜻한다.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믿음의 역사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부터 시작하며 예수는 신약시대 성도들뿐 아니라 구약시대 성도들의 믿음의 원형(archetype) 혹은 본(example)이 되신다. 그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이미 있었으며(요 8:58),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였으며(유 5), 광야에서 인도하고 먹이셨다(고전 10:3f.). 그리하여 예수야말로 그리스도교 믿음의 창시자요, 선구자인 것이다. 그분의 믿음은 신구약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원형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믿음이 그 속에서 완전의 정도에 이른 분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뢰와 순종은 어떤 신구약 성도들에게서 볼 수 없는 완전의 극치의 믿음이다. 그분에게서만 믿음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벨도 아브라함도 모두 그분의 믿음의 그림자요 모형일 뿐이다. 그리하여 11장에서의 믿음의 선진들을 논한 저자는 그것의 절정으로서 예수의 믿음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12:1-3). 이리하여 이 구절에서도 역시 “완전함”은 ‘이데아’적인 완전함, ‘총체적인 완전함’, ‘원형적’인 완전함을 뜻한다.
3. 결어
이상의 연구사와 본문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히브리서의 ‘완전함’의 개념을 결론짓게 한다. 히브리서에서의 ‘완전함’은 ‘도덕적’이거나 ‘제의적’인, 혹은 ‘영지주의적’ 완전함이 아닌, 플라톤이나 필로의 ‘이데아’적인 완전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현상계나 중보계를 초월한 세계, 곧 하늘에 속한 완전함을 뜻한다. 그것은 어떤 도덕적인 특성이나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획득되는 무엇이 아니고 마지막 날들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활동과 행위에 속하여 있는 종말론적인 실체이다. 이런 완전함의 개념을 가지고 저자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완전함, 그의 구속(제사) 사역의 완전함, 성도의 받은 구원의 완전함, 그리스도가 가진 믿음의 완전함, 그리스도교의 완전함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리스도를 하늘의 ‘이데아’가 내려온 분으로 보고 있는 점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이데아’ 같은 분이기에 그분이 한 사역(10:14), 그분이 제사직을 집행한 성막(9:11, 24), 그분의 대제사장직(8:4), 그분이 드린 제물(9:23), 그분이 가진 믿음(12:2),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교(6:1) 및 그리스도인(5:14), 그분이 마련한 처소(11:40)는 모두가 다 “완전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