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사도 바울 2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행19:21)
교회라는 시스템의 기원은 역시 로마입니다. 바울의 로마 여행과 로마 기독 공동체에 보낸 편지는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신앙체계는 바로 바울의 신학의 그것이 체계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회복 운동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보다 어쩌면 바울의 신학의 구조를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로마를 보아야하겠다'는 바울의 이방 선교에 관한 신념이 없었다면, 유대교의 이단 지파였던 기독교는 갈릴리 어디에 잠시 존재했던 소수파 종교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로마의 대화재 The Fire of Rome, 허버트 로버트 Hubert ROBERT, 1771년. 64 AD에 일어난 로마의 대 화재를 그린 그림
기독교는 로마에서 본격적으로 제도화되면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순교 당했습니다. 긴박한 예수 재림을 기다리며 이스라엘 회복운동을 꿈꾸던 베드로와 바울의 그 피는 이 로마 제국에서 처음 교회 공동체의 씨를 뿌렸습니다. 사도들이 뿌린 로마의 복음화 씨앗은 훗날 초기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침략사와 괘를 함께 하며 세계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크게 번성했습니다.그것이 로마 가톨릭이고 바티칸입니다
바울이 로마 전도가 시작되던 처음 교회 시절인 64년 7월의 어느 더운 밤, 로마의 키르쿠스 막시무스 근처에 있던 낡아빠진 상가에서 불이 났습니다. 화염은 빠르게 퍼져 도시 전역을 휩쓸고 9일 동안 맹위를 떨치며 영원한 도시' 로마를 3분의 2를 태우며 사그러졌습니다. 이 로마의 대 화재 사건은 초기 기독교 박해 사건(박멸에 가까운)의 빌미를 주었습니다.
기독교인을 공개 화형을 치르고 있는 그림, 헨릭 세미라드즈키 Henryk Siemiradzki. 오른쪽에 묶인 기독교인 화형식이 막 시작되고 있다.
네로의 정원에서 로마 시민들과 네로가 보는 앞에 로마 대화재의 방화범들로 지목된 초기 기독교인을 모두 말목에 묶어 화형식을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네로 황제(37년- 68년)는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말하며 기대하던 기독교도'들이 불을 질렀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즉시 기독교도들을 잡아 화형 시키고 사자굴에 던지게 됩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전도하던 그 시기였습니다.
순교한 기독교인 디르케 A Christian Dirce, 겐릭흐 쎄미라드스키 (영어식으로는 헨릭 세미라드즈키 Henryk Siemiradzki )그림, 1897년, 바르샤바의 국립 미술관 소장
네로 황제 시대 네로의 정원에서 황소 뿔에 받혀 순교하고 있는 기독교인 디르케 A Christian Dirce입니다, 눈처럼 흰 그녀의 피부와 검은 황소 주위에 뿌려진 붉은 피와 대비되어 처연합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 방화범인 기독교인들을 고대 로마 신화에 나오는 '디르케의 학대와 죽음'을 그대로 재현하여 모진 고문 후에 다시 황소 뿔에 묶어 도시를 질질 끌고 다니며 갈가리 찢겨 죽게 만들었던 처형 방식을 집행하며 로마 시민들과 즐거워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묵상하다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프레스코, 미켈란젤로 Michelangelo의 '사울의 회심 The Conversion of Saul'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벽에 1542?45년에 그려진 미켈란젤로 Michelangelo의 프레스코 중에도 '바울의 회심 The Conversion of Saul'을 테마로 한 거대한 벽화가 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면서 말에서 낙마하던 그 순간의 그림입니다. 예수의 사도들은 모두 예수의 공생애에서 그를 목격했거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지만 바울은 달랐습니다. 예수의 밀당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환상을 통해 회심하여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난데없이 등장한 바울은 당시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 제자 패들에게 심각한 견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뜨내기라는 따돌림에 그의 편지 곳곳에는 '나 사도 바울은...'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15세기 바르톨로메오 몬타냐 Bartolomeo Montagna가 그린 세인트 바울 Saint Paul 의 모습이다.
세인트 바울 Saint Paul,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고 예루살렘에 있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신학을 배웠습니다. 유대교의 히브라임 전승과 로마의 헬레니즘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그에게서 이방 선교의 신학적 기틀이 세워졌습니다. 그는 신약 성서의 대부분의 텍스트를 쓴 서가이지만 그중에서도 로마의 기독 공동체에 보낸 편지 '로마서'는 복음이 구원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선포하며 은총과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값없이 의롭게 된 은총을 가르칩니다.
그의 서간문을 쓰고 있는 바울 Paul Writing His Epistles, 17세기 발랭탕 드 불로뉴 Valentin de Boulogne에게 헌정한 그림, 작가 미상
로마서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고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의롭다 일컬음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며 구원의 길은 하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야훼의 은총으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자신의 죽음으로 여호와의 사랑을 증거하셨고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구원케 하신다, 자신을 의지하면 죄와의 싸움에서 절망뿐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의 성령을 주셔서 야훼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신다 고 썼습니다.
데일리 그래프 The Daily Telegraph는 6세기에 만들어진 사도바울의 초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텔레 그래프 2016, 11월 28일 자 기사에서 고대 로마의 지하 동굴 교회 카타콤 남쪽 천정에서 발견된 사도 바울의 프레스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나폴리 산 제나로 카타콤 Catacombs of San Gennaro in Naples에서 발견된 '1,400년 전의 사도바울의 프레스코화를 고대 로마의 카타콤에서 발견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지하교회에 새겨진 바울의 프레스코 초상은 사도 바울의 가장 오래된 초상이 됩니다. 이의 진정성을 보증하듯 교황청에서 발행하며 교황의 정식 칙령이나 설교를 전하는 바티칸 공식 일간 신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L'Osservatore Romano에도 이 사도 바울 프레스코 발견 기사가 실렸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의 네 명의 사도 The Four Apostles, 1517년. 패널 크기 215 cm x 76 cm, 보리수나무에 유채, 독일 뮌헨 피나코테크 미술관 Alte Pinakothek, Munich 소장
르네상스 미술 중에 사도 바울이 가장 잘 표현된 그림은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가 그린 이 그림, 이 네 명의 사도 The Four Apostles입니다. 뒤러는 당시 이미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와 베네치아 장기 여행에서 돌아와 마침내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합스부르크 왕가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대공에게 고용되어 연금을 받으며 왕실의 미술 작업을 하던 무렵에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그리던 1517년 가을, 뒤러는 독일의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를 만나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시절입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의 네 명의 사도 The Four Apostles, 왼쪽 복음 사가 성 요한 St. John the Evangelist과 성 베드로 St. Peter, 1517년. 패널 크기 215 cm x 76 cm, 보리수나무에 유채, 독일 뮌헨 피나코테크 미술관 Alte Pinakothek, Munich 소장
책을 펼쳐 보고 있는 이가 복음사가 성 요한 St. John the Evangelist이다. 베드로 St. Peter에게는 열쇠가 그려있다. 성 요한은 낙천적 sanguine인 모습이다. 성 베드로는 무덤덤 냉담한 phlegmatic 표정이고,
네 사도 중에 오른쪽 패널 The Four Apostles right part, 성 마가와 성 바울 , St. Mark's and St. Paul,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패널 크기 215 cm x 76 cm, 보리수나무에 유채, 독일 뮌헨 피나코테크 미술관 Alte Pinakothek, Munich 소장
성 마가는 격하게 화를 잘 내는 choleric 다혈질로, 성 바울은 우울한 melancholy 모습입니다. 성 마가에게는 두루마리를 입고 있고, 성 바울에게는 검(칼)을 쥐고 손에는 편지 서신이 있습니다. 네 사람 모두의 기질이나 성품의 상징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의 네 명의 사도 The Four Apostles 그림 중 성 베드로 St. Peter의 얼굴만 클로즈업, 부분 디테일
베드로는 성격이 너무 불같아서 실수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언제나 그의 손에는 열쇠가 쥐어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 정확히는 '할례받은 사람들'의 사도로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 바오로와 대비됩니다.
네 사도 중에 오른쪽 패널 The Four Apostles right part, 성 마가와 성 바울 , St. Mark's and St. Paul 중에서 바울의 얼굴 부분 디테일
사도 바울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의 모습은 교황청 마당에 서있는 대리석 동상의 할리우드 배우 같은 모습은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대머리였으며 안짱다리였고 눈썹은 가운데가 붙었고 코는 약간 매부리코였으며 등이 굽어 꼽추처럼 보인 사람이었다는 것', 우리들이 생각하는 광채가 나는 그런 모습과는 먼 용모였습니다. AD165년 경에 쓰인 외경, '바울로와 데클라 행전 The Acts of Paul and Thecla'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와 안디옥 등을 선교할 때 바울을 따르던 믿음의 여종 데클라가 바울의 선교 여행에 동반하면서 바로 옆에서 바라본 많은 바울의 신상 용모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뒤러의 사도 바울 모습을 소개하는 것은 바로 그 바울의 용모와 가장 근접한 초상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대머리에 강한 눈매와 눈썹, 약간 매부리코에 불안정한 표정과 강렬한 아우라, 그야말로 '바울로와 데클라 행전 The Acts of Paul and Thecla'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바울의 프로필 초상입니다. 그러나 그가 설교를 하면 불을 토하는 것처럼 권세가 있었다 합니다. 거친듯하며 야성적이지만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있어 제가 좋아하는 성화이기도 합니다.
카라바지오 Caravaggio의 그림이 있는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플로 Santa Maria del Popolo 성당의 체라시 채플 Tiberio Cerasi
'그대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권하십시오'. 바울의 디모데전서 6장 1절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여러분에게 사도 바울의 편지 중에 내가 가장 감명받은 구절 하나를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 Paul the Apostle, 렘브란트 판 레인 Rembrandt Harmensz van Rijn c. 1657년경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표준 새 번역 디모데전서 6; 6- 10)
바울의 가르침 중 한 구절입니다.
사도바울 Apostle Paul, 렘브란트, 1633년, 캔버스에 유채, 137 x 112 cm, 빈 미술사 박물관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책상에서 글을 쓰는 사도 바울 St. Paul At His Writing Desk, 렘브란트, 1630년경, 바로크 스타일의 종교화, 캔버스에 유채,
- jrkimce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