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갈라디아서 6장

은총가득 2020. 5. 26. 10:18

6장: 자유자의 삶-선행

갈라디아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증거한다. 제5장은 자유자의 사랑의 삶을 강조하고, 제6장은 자유자의 선한 삶을 강조한다.

 

1-5절, 짐을 서로 지라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범죄한 일’이란 앞 장에서 언급한 ‘육체의 일’을 가리킨다. ‘드러난다’는 원어(프로람바노)는 ‘예상치 않게, 뜻밖에, 실수로 당한다’는 뜻을 가진다. ‘신령한’이라는 말(프뉴마티코스)은 ‘영적인’이라는 뜻으로서 ‘성령을 받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모르고 구원받지 못한 자는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지만,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는 성령을 받은 사람,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영적인 사람’이다.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범죄자에 대하여 취할 성도의 태도에 대하여 몇 가지를 교훈한다. 첫째로, 성도는 그 범죄자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성도가 범죄자를 무관심하게 내버려두거나 그와 상종치 않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이다. 성도는 마땅히 범죄자에게 충고하고, 또 필요하다면 그를 책망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다른 서신에서 ‘규모 없는 자들[무질서한 자들, 불순종하는 자들]을 권계하라’고 말했다(살전 5:14). 히브리서 저자도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말했다(히 3:13).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성도가 범죄자를 바로 잡되, 온유한 심령으로 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도가 범죄자를 바로 잡되 높은 마음이나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심령으로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말도 거친 말이 아니고 겸손하고 부드러운 말일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인격의 모습이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도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하였다(딤후 2:25).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둘째로, 바울 사도는 성도가 범죄자를 바로 잡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너도 시험을 받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성도 각자가 시험을 받지 않고 범죄치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성도 각자의 성화가 중요하다.

성도에게 있어서 자신의 성화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구원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것은 죄 안짓는 거룩한 삶이다.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새 생명은 좋은 씨이므로, 그 씨를 받은 구원받은 성도마다 거룩한 삶이 요구되는 것이다.

성도에게 성화가 중요한 까닭은, 또한 그가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6).

성도에게 성화가 중요한 까닭은, 또한 그가 그것으로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구원의 목적이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표현하였다(벧전 2:9).

성도에게 성화가 중요한 까닭은, 또한 그것이 남의 구원을 위하기 때문이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을 확증하고 기독교의 참됨을 확증한다. 그리함으로써 성도의 성화는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한 몫을 한다.

우리 자신이 범죄하면 나쁜 점이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기 쉽다. 성도가 범죄한 후 즉시 그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성도가 즉시 회개치 못하면 그의 기도의 입이 막히고 소위 ‘기도의 문’이 막힌다. 또 아픈 사람이 밥맛을 잃듯이, 성경을 읽을 마음도 식어진다.

범죄한 성도는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잃어버린다. 또 그는 하나님의 징벌, 때때로 질병과 경제적 빈궁 등으로 찾아오는 징벌을 받을 수 있다. 성도가 범죄하면,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성도를 보고 ‘저런 사람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아이구, 저런 사람이 교회 집사라고 하니!’ 하면서 하나님께 욕을 돌린다. 또 범죄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위해 유익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인데, 그는 하나님을 위해 쓸모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성도가 한 번 범죄하면 그 다음에는 더 큰 죄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끝까지 회개치 않으면, 그는 택함을 받지 않은 자 곧 버림받은 자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라’고 말했다(살전 4:3). 성도가 죄 짓지 않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을 법적으로 의롭다 하시고 그와 더불어 실제적으로도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책을 가지고 교회를 출입하는 참된 성도마다 거룩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중요한 한 목표는 죄 안짓고 사는 것이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셋째로, 바울 사도는 성도가 범죄자를 바로 잡고 자신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또한 짐을 서로 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 ‘짐’이라는 원어(바로스)는 ‘무거운 짐, 큰 짐’을 의미한다. 그것은 드러난 죄들, 도덕적 결함들을 가리킨다. ‘서로 지라’는 것은 남의 드러난 죄들과 결점들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하라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사도는 말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주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저녁 식사를 하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그런 다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죄의 용서를 상징했다. 주께서는 ‘온 몸을 씻은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중생한 자 곧 구원받은 자가 날마다의 실수와 부족을 씻는 것을 의미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결함, 결점, 약점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서로 사랑하려면 서로의 결함과 실수와 부족에 대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성도가 짐을 서로 질 때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이룰 수 있다.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짐을 서로 져야 할 이유를 보인다. 다시 번역해 보면, ‘왜냐하면 만일 누가 아무 것도 아니면서, 무어라고 생각하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니라’이다. 우리는 남의 짐을 지지 못할 정도로 높고 고상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남의 드러난 실수와 범죄를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다 똑같이 부족한 사람이며, 어느 날 우리 자신도 다른 이의 죄와 비슷한 죄를 범할지도 모른다.

[4, 5]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원문에는 4절 초두에 ‘그러나’라는 말이 있다. 성도는 자기를 크게 생각하지 말고 각각 자기의 일을 살펴야 한다. 그러면 자랑할 것이 자기 안에서는 혹 있을지라도 남과의 관계에서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가 각각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짐을 서로 진다는 것이 자신의 짐에 대한 책임 회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은 범죄자에 대해 가져야 할 성도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첫째로, 성도는 범죄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둘째로, 성도는 시험을 받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셋째로, 성도는 짐을 서로 져야 한다. 이것은 남의 연약과 부족에대하여 관용하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요약하면,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우리 자신도 범죄치 말고 다른 이도 범죄치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 함께 구원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그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6-10절, 선을 행하자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가르침을 받는 자’는 모든 성도요,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목사들이다.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는 말씀이다. ‘모든 좋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들은 음식과 옷과 집 등을 포함한다. 박윤선 목사는, 본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는 교인들이 물질적으로 참된 자격 있는 교역자들을 도와 주어야 할 것”을 가르치며,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의 주신 물질적 축복을 가리킨다”고 주석하였다(바울서신[상], 103쪽). 훌륭한 청교도적 주석가 매튜 풀(Matthew Poole)도 “여기 언급된 ‘좋은 것’은 목사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데 사용될 현세적 좋은 것들(temporal good things)을 가리킨다”고 주석하였다(성경 주석, 3권 660쪽).

가르침을 받는 자는 왜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영적인 일의 종사가 육적인 일의 종사보다 더 귀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육적인 일은 썩는 양식을 위한 것이지만, 영적인 일은 영생하는 양식을 위한 것이다. 육적인 일은 이 세상 살 동안만의 일이지만, 영적인 일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한 세상에서도 유익한 일이다. 영적인 일은 곧 하나님 자신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기를 원하시는 바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셨고 지금도 그 이루신 바를 사람들에게 적용하기를 원하시는 일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5:27에서 이 사실을 증거하기를,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다. 우리가 영적인 것의 참 가치를 안다면, 육적인 것을 함께 나누기를 아까와 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는 고린도전서 9:11에서도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라고 했다. 바울 사도가 이런 이유 때문에 영적으로 어린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이치는 그러하였다. 참된 목사들이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지만, 교인들은 이런 이치를 알고 이 말씀을 순종하려 해야 할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도 원리적으로 이런 이치를 확증한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성전 봉사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후한 공급을 하였다. 민수기 18:21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12지파에 속한 백성들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려져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12지파의 각 지파가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쳤으니, 각 지파에는 10분의 9가 남았을 것이고, 레위 지파는 10분의 12를 얻었을 것이다. 물론 레위 지파는 그들이 얻은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려 제사장들에게 주었다. 그러면 실제로 레위 지파가 얻은 소득은 10분의 11이 조금 못된다. 이와 같이, 레위 지파의 소득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소득보다 평균적으로(!) 많았다.

한편, 제사장들은 레위인들보다도 더 윤택한 생활을 했다. 아마도 제사장들의 수가 레위 지파 전체 수의 10분의 1에 미치지 못했을 터이지만, 그들은 레위 지파가 받은 10분의 12 중에서 10분의 1을 받았다. 제사장들은 이런 십일조 외에도 백성들의 제물들의 일부분을 그들의 몫으로 받았다. 민수기 18:12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제사장들에게 주었다’고 했다. 또 민수기 18:29에 보면, ‘레위 지파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모든 예물 중에서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취하여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고 말씀했다. 여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원어(켈레브)는 ‘기름진 것,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한다. 제사장들은 가장 좋은 것들을 풍성하게 받았다.

이와 같이,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레위 지파 사람들과 제사장들 곧 성전의 일에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 윤택함을 주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운영의 원리를 보인다. 물론, 신약 시대에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 성전 일에 전무(專務)한 자들이 있었듯이, 신약 시대에도 복음 사역의 일, 교회의 일에 전무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목사들이요, 목사 후보생들 곧 전도사들이요, 또 교회의 기타 전임 봉사자들(full-time workers)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이 구약의 십일조 정신으로 교회의 목사들과 목사 후보생들 그리고 교회의 전임 봉사자들에게 물질적으로 공급한다면, 목사들은 오직 성경 연구, 독서, 설교 준비, 심방 등 주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고, 목사 후보생들은 충실한 신학 교육과 목회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교회의 기타 전임 봉사자들을 채용하는 데도 어려움이 줄어들 것이다.

물론, 물질적 유여함이 교회 봉사자들을 생활의 해이함과 불성실함에 빠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오늘날 어떤 목사들의 사치나 안일은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죄악이요 사탄의 시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그들 간의 문제이다. 교회와 성도들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십일조 제도에서 보여주신 정신을 따라 마땅히 교회의 전임 사역자들을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공급하는 것이 옳다. 교회가 재정이 부족해서 그들에게 유여하게 공급하지 못하면 몰라도, 재정이 있는대도 인색한 마음으로 바르게 쓸 줄 모른다면 그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원어는 단순히 ‘속지 말라’고 번역할 수 있다. 누구에게 속지 말라는 뜻인가? 아마도 마귀에게, 또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에 속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조롱함을 혹은 업수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뜻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선대하고 후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다. 앞에서 언급한 십일조 제도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켈레브, best part)을 요구하셨다(민 18:12, 29, 30, 32). 신명기 6:4, 5은 증거하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영혼,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다. 잠언 3:9, 10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최선의 것, 최상의 것을 원하신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업수이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의 근거로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것을 든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이 구절이 시작된다. 심은 것을 거두는 것은 자연계에나 영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사무엘상 2:3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사사 엘리에게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귀한 것으로 섬겨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귀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장 귀히 여기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이 말씀을 하나님께 대해 적용해 보라.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좋은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해야 한다.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원문에서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본절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의 근거를 다시 제시한다.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은 육신의 일, 세상의 일, 혹은 죄악된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썩어진 것’은 ‘썩는 것’을 가리킨다.‘썩어진 것을 거둔다’는 말씀은 육신의 일, 세상의 일, 혹은 죄악된 일의 결과는 다 ‘썩는 것, 멸망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성령을 위해 심는다는 것’은 믿음의 일, 의로운 일, 선한 일, 복음 전도의 일, 교회 부흥의 일, 교회 건립의 일을 가리킨다. 그것은 영생의 길이다. 이것은, 사람이 이런 일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는 자는 범죄하는 자가 아니고 육체를 위해 심는 자가 아니고, 성령으로 사는 자이며 성령으로 심는 자, 곧 선한 일을 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교회에 참석하고 헌금하는 일, 전도하고 선행을 하는 일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 영생 얻은 자들의 표요 장차 영생에 들어갈 자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일들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을 대접하자. 또 교회는 세상 일을 버리고 교회의 일, 하나님의 일, 복음 사역에만 전심전력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멸시하지 말고 물질적으로 선대하며 후대하자.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을 행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 구원의 열매이다. 그것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디도서 2:14은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본문은,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기 쉬움을 보인다. 아마도, 남이 그를 몰라줄 때, 또는 남이 오히려 그를 비난할 때, 또는 좋은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을 때, 선을 행하는 자는 낙심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때가 있다. 무엇을 거두는 것인가? 영생을 거둔다. 영광의 천국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가오고 있다. 영생의 세계가 다가오고 있다. 죽음의 현세는 영원하지 않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 곧 100년의 삶의 세상,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저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다.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더욱’이라는 원어(말리스타)는 ‘특히’라는 뜻이다. 선행의 대상에는 구별이 없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 선한 일을 해야 한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을 전달하면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한다.

초기의 예루살렘 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좋은 모범이 되었다. 사도행전 2:44, 45은 증거하기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하였다. 또 사도행전 4:32은 증거하기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6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은 선행에 대해 강조한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는 정신으로 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낙심치 말고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삶에서도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히 영원 세계에도 적용된다. 믿음으로 바로 산 자, 성령의 감동 속에서 선을 행한 자는 확실히 영생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믿음 안에서 선을 행하기를 힘쓰자.

 

11-18절, 할례냐, 십자가냐?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은 본서신을 친필로 쓴 것 같다. 로마서 같은 서신은 더디오가 대서(代書)하였다(롬 16:22). 바울이 본서신을 친히 쓸 때 큰 글자로 쓴 것은 아마 그의 눈이 나빠서이었을지 모르겠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당시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율법주의자들이 신자들에게 예수만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데 있었다(행 15:1).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이런 교리적 무지나 오해 때문에 혹은 교회를 혼잡시키고 부패시키는 사탄의 활동으로 인하여 잘못 가르친 교사들 뿐만 아니라, 또한 단순히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억지로 할례 받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교리에 대한 어떤 진지함이 있어서가 아니었고,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었다. 그들은 육체의 핍박 때문에 하나님의 귀한 복음 진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 진리를 저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큰 무지와 배신인가!

[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할례의 본정신은 율법을 지키는 데 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언약의 내용인 율법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같다. 그러나 할례를 이미 받은 자들도 실상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육체로 자랑하려고 즉 ‘아, 갈라디아 교인들도 우리처럼 할례를 받았다, 할례는 이렇게 중요하다’고 말하려 함이었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러나 바울에게는 할례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는 할례 받은 육체가 아무런 자랑거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상, 그의 자랑거리는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그가 복음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세상의 것들이 그에게 대단하게 생각되었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결코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는 빌립보서 3:7-9에 증거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그토록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자랑거리인가? 그것은 대속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대속(代贖)이란, 구주께서 나의 죄값과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해 주신 일이었다. 구주의 대속이 없었다면 나는 죄악된 세상과 운명을 같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주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악된 세상에 속했던 과거의 나는 끝났고 새로운 내가 시작되었다. 나의 모든 죄를 구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과거의 나, 곧 죄악되었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과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없이 세상의 그 무엇도 이제는 성도에게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그에게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를 보인다. 전통 사본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으되’라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의, 곧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하나님의 의를 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는 아무 효력, 아무 힘, 아무 유익이 없다. 구약의 할례는 율법 준수의 의무를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율법은 오직 사람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줄 뿐이었다.

그렇다고 무할례 곧 할례 받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는 뜻도 아니다. 이방인의 할례 없음은 이방인이 본래 하나님의 언약밖의 사람들이며 소망이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다.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새 자아(自我)를 가리킨다. 고린도후서 5:17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했다. 이 구원은 법적으로 죄인이었던 자가 의인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새 피조물은 새 생명을 얻은 자요 새 성향을 받은 자이다. 구원받은 영혼의 그 새 성향은 지식과 의와 거룩만을 향한 성향이며 범죄치 아니하는, 아니 다시는 범죄할 수 없는 성향이다. 그러므로 새 피조물된 사실은 새 삶으로 나타난다. 새 삶, 거룩한 삶, 의로운 삶, 죄 안짓는 삶은 새 피조물된 증거요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효력이 있고 유익이 있다. 그 외엔 아무 것도 의미도, 가치도, 효력도, 유익도 없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정죄된 자요 허무한 자이며 영원한 멸망 곧 영원한 지옥 불못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이다.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규례’라는 원어(카논)는 ‘규칙, 원리’라는 뜻이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라는 원어는 ‘이 규칙을 따라 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 규칙’은 복음 원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피조물만 효력이 있고 유익이 있다는 원리를 가리킨다. ‘이 규칙을 따라 행하는 자’는 복음 신앙을 가진 모든 진실한 성도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다음의 말도 ‘영적 이스라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 듯하다.

[17, 18]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 사도를 괴롭게 한 것은 그의 사도직과 그 권위를 부정하고 그의 전한 복음을 대항하고 왜곡시킴으로써이었다. 바울은 이런 도전 때문에 이 편지를 쓰게 되었었다. 바울은 자기를 괴롭게 말아야 할 이유를 그 다음에 말한다. 원문에는, ‘이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음이니라’고 되어 있다.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님 때문에, 그의 복음 때문에 그가 받은 고난의 흔적, 예를 들어 채찍을 맞은 자국 등을 가리킬 것이다.

 

결론적으로 11절부터 18절까지의 본문이 보이는 바는 다음 몇 가지이다. 첫째로, 할례와 십자가는 두 개의 별개의 구원 원리를 보인다. 할례는 율법 준수의 원리를 보이고, 십자가는 복음 신앙의 원리를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긍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 우리는 이제 할례의 법 아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율법으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와 다른 원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믿고 자랑해야 한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의 확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큰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찬송의 제목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감사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복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율법의 멍에 아래 있거나 율법에 종노릇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앞 부분이 강조한 복음 원리이었다. 즉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복음 원리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은 자로서 이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새 피조물로 만드신 것이요 그것은 새 삶을 살게 한다. 그 삶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이다. 이제 주를 믿는 우리 모두는 복음의 바른 원리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