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바울의 율법관

은총가득 2020. 5. 13. 11:47

 

   바울의 율법관

 

     1. 율법에 대한 언어적 고찰

 

구약에 나타난 율법

구약에서 율법은 일반적으로 토라로 불러졌는데 이 용어는 야라의 히필형으로 호라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본래 이 말은 제사장이나 예언자가 주는 개개의 지시나 가르침을 의미했다. 그러나 후에는 어떤 규정, , 법령집을 가리키게 되고 모세오경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토라?는 단수로써 하나의 을 의미하나 복수로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교훈해 주며 자기를 계시해 주신 바대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살도록 지도하는데 있다. 완성된 구약성경에서 토라는 전문적으로 오경을 가리킨다. 즉 그것은 율법 본문을 포함하고 위대한 입법자 모세가 죽기까지의 그 역사를 포함하는 구약의 앞부분을 가리킨다.

 

신약에 나타난 율법

헬라어 νομος(율법)는 어원적으로 μενω(분배하다)에 속하며 그러므로 적당한 것, 어떤 사람에게 할당된 것이란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에서 고대에 그것은 존재하거나 용인되는 규준, 규칙, 관습, 사용 또는 전승의 종류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법위의 의미를 갖는다. 그 개념은 기원적으로 종교적이며 제의에서 주요 역할을 한다.

 

법적인 규준이나 사용이 의식적으로 고정적이며 구속적인 νομος, 즉 법이 되었다. 여기에서 정치적인법과 절대적인 법 사이에 구분이 없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νομος는 자연의 법, 도덕을 위반 시에 처벌규정을 가진 강제적 명령 또는 국가의 규칙들을 의미하게 되었고 νομος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법규로 이해되었고 5세기말 궤변학자들 간에 νομος는 그것의 원래 의미와 아무 상관도 없는 변질된 의미인 계약 또는 협정으로도 될 수 있었다.

 

히브리의 율법 개념이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에서 νομος로 표현된 히브리어가 여럿이 있다. νομος로 가장 많이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라?인데 따라서 토라는 신약의 법 개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헬라어 νομος70인 역을 통해 각기 다른 히브리적 율법대념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용어로 발전하였다.

모세를 통한 율법의 반포 이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전반에 걸쳐 지침이 되었으며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방벽의 구실을 하였고 더 나아가서 영혼을 소생케 하는(시편 19:7) 기능이 있는데 이는 언약의 기초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율법의 중요성은 언약의 개념을 흐리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소유하는 조건이 되었다.

 

바울의 νομος 사용

율법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그가 모순된 진술을 상당히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퍽 어렵다.

 

바울에 있어 νομος의 사용은 완전히 일정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가 구약의 율법을 지칭하지 않았을 때도 때때로 이 용어 νομος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바울에 있어 νομος는 어떤 행동을 욕하는 것으로 특별한 뜻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율법이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었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바울 서신중 νομος는 전부 110회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로마서에 67, 갈라디아서에 29회가 나온다.

 

그러므로 바울의 율법개념이 이 두 서신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는데 갈라디아서는 유대주의자들과 율법문제로 충돌하는 교회에 즉석으로 써 보낸 서신이다.로마서는 현실적인 어려움의 상황이 없는 가운데 바울이 심사숙고하여 저술한 서신임으로 그의 율법개념이 더욱 잘 나타나 있다.

 

2. 율법의 목적

 

1) 죄를 깨닫게 한다.

율법의 부정적인 역할 안에 그 목적이 놓여 있다.

율법은 인간의 자력 구원의 길을 막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율법의 반대측면이 율법자체를 통해 해명된다고 할 수 있다. 율법의 부정적인 측면을 통해 믿음의 길의 필수 불가결함을 천명해 보이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 수 있고 이는 믿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율법의 결과는 죄를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된다(3:20, 7:7).

 

E. P. 샌더스(Sanders)는 로마서 7장에 나타난 율법의 목적을 육신과 죄, 그리고 사망과 관련하여 설명한 바 있다.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바울이 의롭다함이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나오지 않음을 확언한 다음 하나님의 계획에서 율법에 다른 역할을 돌린다는 점을 지적했다. 샌더스는 로마서 7장에 나타난 율법의 역할을 한마디로 '죄를 드러냄으로 인하여 인간이 정죄를 받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대하는 목적'에 활용되는 것으로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7:7에서 율법과 죄를 깨닫는 것의 관계를 언급했다("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그리고 로마서 5:20에서 율법에게 할당한 역할("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은 로마서 7:13의 한 절에 다시 반복된다("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를 심히 죄 되게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7:13의 목적절은 갈라디아서 3:22, 24; 로마서 5:20의 목적절과 달리, 하나님이 죄를 깨닫는 것이나 죄를 더하는 것은 선하게 바꾸신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사실 죄를 낳는 능동적 작인은 하나님이 아니며 율법도 아니며 바로 '' 자체다.

 

바울 사상의 정수는 역시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율법'의 가치가 허락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윤리가 된다는 것이 바울의 사상이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이며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더 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7:4-6).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8:2-3).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성령의 권세 아래 있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3:31)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 사랑의 계명에 매여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13:8-10),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고전 9:21)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6:2)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율법관의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바울이 반율법적 견해를 가졌다거나 율법에 대한 제한 된 견해를 가졌다거나, 자기 당대 유대인들의 율법관을 부분적으로 용납하였다.

 

2)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의 기반 위에서 율법의 기능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가 올 때 믿음의 계시는 일어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는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7장에 나타난 율법의 목적은 인간들에게 죄를 알려주고 그 파괴적인 결과들을 보여주며, 성령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로마서 10:4)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는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는 말은 율법의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실현된 의미로 여겨져 왔다.

 

율법의 모든 교훈과 모든 명령 모든 약속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의를 벗어던져 버리고 우리가 지은 죄악을 깨닫고서 굴복하여야 하며 또한 공로 없이 거져 주시는 의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할 때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부활로서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다. 예수께서 "다 이루어졌다"고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율법의 요구에 직면해서 그 값을 치루시려는 인간 노력의 끝이라는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며 다른 면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믿는 자에게 율법의 의를 부어 주셨으며 우리 안에서 성취시켜 주셨다.

 

신자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로마서 7),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며, 율법에서 구원받게 되었다.바울은 율법으로 벗어났고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라고 강조하면서도 그가 새로운 순종의 내용과 새로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자 할 때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다(8:3).

 

3. 은혜 아래 사는 삶

 

1) 율법에서 해방된 삶(로마서 7:4)

: 율법에서부터의 해방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의무에서 해방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 뜻을 우리의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행하는 그 행함에서 해방된다는 뜻이다. 그가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즉시로 나 자신을 율법 두는 것이다. 이제부터 새 계명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2) 율법의 완성 사랑

바울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율법은 제 3의 기능을 하는 적극적인 율법의 기능을 말하고 있다(13:8-10 ).

볼트만은 율법에 대해 두 종류로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계속적인 뜻에서의 율법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가 폐했던 율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신자와 율법의 관련성을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명령에 입각하여 규정짓는다(13:8). 그는 무슨 계명이든지 사랑 안에 다 포괄되었다고 하였다(13:9). 그는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였고(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했다. 완성이라는 말은 '충만하다', '채우다', '성취하다'의 뜻이 담겨져 있다.

 

사랑이 율법의 요약이며 율법의 완성의 기준이 된다. 이점에서 바울의 율법에 대한 견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3) 성령을 좇아 사는 삶(로마서 8:3-4)

성령에 관하여 살펴볼 때 이 또한 사랑에 근거한다. 성령이 자유와 순종과 관련 되어 되풀이 해서 말해지는 것을 볼 때 성령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규범이 된다. 성령은 육체를 지배하는 것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산다.'라는 한 표준을 말해준다. 성령은 육체의 소욕과 대적된다. 그러나 이것이 율법과 대립되거나 또는 율법을 대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더 이상 율법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율법의 유효성과 요구를 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확고히 하고 완성시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사역은 정확히 율법이 성도의 삶에서 작용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8:4). 율법 그 자체는 거룩하고 신령한 것이다(7:14)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은 곧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삶이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의미는 성령님께 복종하고 생활의 주도권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님이 행하시도록 자리를 양도하는 것이다.

 

4) 몸을 통한 거룩한 산 제사(12:1)

: 로마서 5장에서 시자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선언하며 6장에서는 신자는 그리스도 와 함께 죽었다는 것과 7장에서는 신자는 날 때부터 완전히 무력하다고 하며 내주하시 는 성령님을 8장에서 언급한다.

너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는 바울의 호소는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 전체에 대한 공헌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온전히 이루어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5) 넉넉히 이기는 삶(로마서 8:35)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율법의 저주와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었다.

율법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은혜 안에 용해되고 흡수되고 말았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3:21) 율법은 복음 안에 용해되고 하나님의 의가 대신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는 율법의 정죄하는 힘과 맞먹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의롭다 하시는 이인 하나님"(8:32)"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8:33-34)를 믿을 때, 우리는 은혜 아래서 넉넉한 승리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