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1-15:13, 이신칭의 받은자의 삶
로마서 12-15:13 이신칭의 받은자의 삶
로마서의 본론 부분은 크게 두 부분으로 1:18-11:36절과 12:1-15:13절로 나눌 수 있다. 즉 중심주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를 중심으로 1-11장은 교리적인 것을 말했다면, 이제 12장부터 16장의 끝인사 전까지 "이신칭의 교리를 삶에 적용하여 어떻게 살것인가?"에 말씀한다.
전자는 이신칭의 복음의 의미로서 인종과 신분과 성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크리스천의 신분의 문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반면에 후자는 이신칭의 복음의 적용 곧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삶의 문제에 관하여 말한다.
또 전자는 주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직설법(과거형)을 말하고 있고, 후자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아직도 계속 이루어져 가야할 명령법(현재와 미래형)을 말하고 있다. 전자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면, 후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적절한 삶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1:18-11장까지 크리스천의 삶에 관한 교훈이 전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은 이미 1:5절에서 “믿음으로 부터 오는 순종”에 대해 언급했고 2:7절에서도 참고 선을 행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새 생명가운데서 행할 것과(6:4) 의의 종으로 살 것(6:18)을 제시하고 8장에서는 성령을 따라 살 것(8:5-6)을 각각 주문하고 있다.
12장부터 바울은 본격적으로 명령법을 사용하여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환은 로마서만의 특유한 것은 아니다.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에서도 나타난다. 흔히 주석가들 중에 전자는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는 신학적 영역으로, 후자는 인간의 사역을 말하는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영역으로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존재와 행위, 신학과 윤리를 나누는 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자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인간의 책임적인 응답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반드시 요구하고 있다면, 후자 역시 인간으로 하여금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없이 우리의 의로운 삶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전자와 후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각각 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양자의 분리는 불합리하다.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자유와 책임을 배제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합당한 삶이 성령의 역사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1:5절에서 자신의 사역을 가리켜 “믿음으로부터 오는 순종”을 가져오기 위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 사실이 이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로마서 후반부에 속하는 12:1-15:13절은 12:1-2, 3-8절, 12:9-21, 13:1-14절, 14:1-15:12절 등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신자의 삶의 대원칙 및 영적 은사에 관하여(12:1-8),
둘째, 신자와 그를 핍박하는 자와의 관계에 관하여(12:9-21)
셋째, 신자의 정부와 사회에 관한 태도에 관하여(13:1-14),
넷째, 로마교회 안의 직접적인 현안의 문제인 이방인신자(강한 자)와 유대인신자(약한 자)와의 갈등의 문제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14:1-15:12).
1.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와 적용(12:1-8)
로마서 12장의 첫 문단에 해당하는 12:1-8절은 1-2절과 3-8절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에 해당하는 1-2절은 12장의 윤리적인 권면은 물론, 12-16장에 나오는 전 권면 부분의 서론에 해당하는 대원칙을 말한다. 반면에 둘째 부분에 해당하는 3-8절은 바울의 실제적인 권면의 첫 부분에 해당하며 합당한 교회생활의 실제적인 원리를 말하고 있다.
1) 크리스천의 삶의 대 원칙 (1-2절)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 요구되어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구속을 받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그들에게 주어진 성령을 따라 살 것이 요구되고 있다.
신약교회 성도들은 시내산의 율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더 탁월하고 효력이 큰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란 말로 표현한다. 여기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같은 말로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그의 신실하심을 대변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문제만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크리스천의 삶도 똑같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일반 세상 윤리와 다른 기독교 윤리의 특징이다. 기독교 윤리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응답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신자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항상 명심하여야 할 세 가지 총체적인 삶의 원리를 밝힌다.
첫째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둘째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셋째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이다.
사실상 이 세 가지는 12-15장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윤리적 교훈을 총괄하는 총론에 해당한다.
첫 번째 권면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영적예배’라고 지칭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 전체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여기 ‘영적예배‘를 가리키는 헬라어 ’텐 로기켄 라트레이안‘(τὴν λογικήν λατρείαν)은 그 앞에 나오는 ’너희 몸‘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지성을 포함하여 전인격적으로 드려야 할 통전적 예배를 가리킨다.
구약의 제사에서는 짐승을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받쳤지만 바울은 신약의 성도들을 향해 우리의 살아있는 몸 그대로 하나님께 드릴 것을 권면한다. 우리의 몸을 드리라는 것은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지성, 감성, 건강, 재물, 직업 등 모든 삶의 영역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영역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거나 그리스도의 주권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삶을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고 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모두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영적예배라는 것이다.
두 번째 권면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세대를 좌우하는 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1:18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는 모든 불경건과 불의, 곧 창조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리고 하나님이 정한 창조의 질서를 거역함으로 일어난 모든 도덕적, 사회적 범죄를 가리킬 수 있다. 여기에는 물질과 성과 명예를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여러 형태의 우상숭배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을 수 있는가?
세 번째 권면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 권면이 소극적인 권면이라면 세 번째 권면은 적극적인 권면이다.
여기 “변화를 받으라.”는 말이 현재 수동태로 쓰여졌다는 것은 이 변화가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령만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세상에서 신자의 성공적인 삶은 오직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한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2)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크리스천공동체(3-8)
3-8절은 신자가 성령을 통하여 계속해서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되어 갈 때, 그가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1-2절이 뿌리에 관한 문제라면 3-8절은 열매에 관한 문제이다. 뿌리가 정상적이면 그 열매도 정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나무는 그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열매가 정상적이 아니면 그 뿌리도 정상적이 아닐 수 있다.
▶3-8절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3-5절은 신자가 교회 생활을 할 때 자신과 동료 교인들에 대하여, 6-8절은 구체적인 봉사의 영역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다.
▶3-5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몸과 각 지체에 관한 실례를 들어 교회 안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지만, 모두 그리스도의 한 몸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다양한 구성원 중의 하나임을 알고 다른 구성원들에게 겸손할 것과, 또 다른 한편으로 각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알고,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겸손과 상대방 신자에 대한 존중이 다양성과 통일성을 함께 가진 교회생활의 핵심이다. 이것이 무너질 때 교회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에 대한 겸손과 동시에 형제자매들에 대한 존중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 핵심적인 대답은 지체와 몸의 비유를 통해, 어느 하나가 없으면 장애자가 될 수밖에 없을 만큼 모두 다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과 함께, 모든 신자가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바른 이해를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인 것을 알 때, 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고 있는 것처럼 상대방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고 있고, 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소중한 은사를 받고 있는 것처럼 똑같이 상대방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소중한 은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진정한 자기겸손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가능하다.
▶ 6-8절은 교회 안에는 실제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각 은사를 소유한 자들은 어떤 자세로 그 은사를 활용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통일성은 은사의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은사의 다양성을 통하여 교회의 통일성이 세워져 간다는 것이다.
우선 6절 초두에서 바울은 모든 은사는 우리의 노력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임을 밝힌다. 은사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모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은사를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은사 없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 사이의 차이점은 누가 은사를 받았고, 누가 은사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 있지 않고 모두가 똑같은 은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은사의 출처와 다양성은 신자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모든 은사가 다 같이 소중하고 상하, 빈부, 귀천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런 다음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예언, 섬기는 일(봉사), 가르치는 일, 위로 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 7곱 가지의 은사를 실례로 든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는 믿음의 분수대로, 즉 개인보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봉사의 은사를 받는 자는 진정한 봉사 정신을 따라,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는 가르치는 일에 전념함으로, 위로의 은사를 받는 자는 위로하는 일에 전념함으로, 구제의 은사를 받은 자는 자신을 들어내기 위함이 아닌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줌으로, 다스리는 은사를 받은 자는 열정적인 자세로, 그리고 긍휼을 베푸는 자는 항상 기쁨으로 하여야 할 것을 교훈한다. 그렇게 할 때 모든 은사는 그 은사 수여자의 본래 목적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2. 교회와 사회 안에서의 크리스천의 책임(12:9-21)
로마서 12장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1-8절이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어떻게 활용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면, 후반부에 해당하는 9-21절은 신자들이 교회와 사회에서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다.
전자는 주로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자세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주로 사람에 대한 합당한 자세에 관하여 교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리적 전개는 고린도전서 12-13장의 흐름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바울은 먼저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자신의 은사를 어떻게 활용하여 교회를 봉사할 것인가에 관하여, 13장에서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자세, 곧 사랑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9-21절은 크게 두 분으로 나누어진다. 9-13절은 신자가 동료 신자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14-21절은 신자가 불신 이웃 사람들에 관하여 특별히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 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양자를 묶는 것은 사랑이다. 전자의 교훈에 있어서도 사랑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고, 후자의 교훈에서도 역시 사랑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1)사랑의 주제
크리스천인 우리는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자매들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바울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 것처럼(요 13:34), 동료 신자에 대하여 먼저 사랑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사랑이 형제자매들에 대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자세라는 것이다.
이점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아무리 많은 은사를 소유한들 사랑으로 그 은사를 활용하지 못하면 그 은사는 무익하다. 그래서 바울은 크리스천의 생활에 있어서 믿음, 소망, 사랑이 각각 중요하지만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고전 13:13). 역시 갈라디아서 5:22절에서 성령이 신자 안에서 가져오는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사랑을 제일 우위에 둠으로써, 사랑이 신자의 모든 삶을 이끌어가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9절에서 계속해서 신자가 사랑을 할 때는 남에게 나타내기 위한 거짓되고 위선적인 사랑이 아닌 진실 된 사랑을 하여야 할 것을 강조한다. 사랑은 오직 선한 목적을 위해 이루어져야하며, 그 어떤 불순하고 악한 동기가 개입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에게 있어서 이 사랑은 단순히 도덕적 의무감의 발로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가장 순수한 사랑의 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바울은 10-13절에서 신자 상호간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교훈한다.
첫째, 동료 신자들을 한 가족처럼 서로 우애하고 서로 먼저 존경하라는 것이다(10절). 동료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자로 알고, 서로 먼저 사랑하고 서로 먼저 존중하라는 것이다. 아마도 로마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을 수 있었으며,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이와 같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둘째,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는 것이다(11절). 이 교훈은 신자라면 누구든지 게으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할 때 누구든지 슬럼프에 빠질 수 있고 게으름에 빠질 수도 있다. 사실상 신앙생활은 100m와 같은 단거리 경주가 아닌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경주이다.
▶그렇다면 신자가 어떻게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부지런할 수 있는가? 바울은 11절에서 두 가지 적절한 방안을 제시한다. 하나는 “열심을 품으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를 섬기라”는 것이다.
전자는 방법에 관한 교훈이라면, 후자는 목적에 관한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 우리말 성경의 “열심을 품으라”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하면 “성령으로 뜨거워져라”이다. 이 말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도록 하라는 말이다. 즉 신자의 생활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성령의 인도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신자의 성공적인 생활의 비결이다.
그 다음 “주를 섬기라”는 말은 신자는 모든 생활을 함에 있어서 항상 주님을 의식하면서 주님께 봉사하는 자세로 하라는 뜻이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을 바라보고 생활하면 낙심하고 나태해질 수도 있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위해 모든 일을 하게 될 경우 낙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12절)는 것이다. 여기 소망과 인내와 기도는 마치 열쇠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소망 없이 인내할 수 없고 기도 없이 인내할 수 없다.
신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환난을 만날 때 어떻게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환난을 친히 당하시고 승리하심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으며, 주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가능하다. 주님께서 친히 그의 제자들을 향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하면서 신자가 환난을 극복할 수 있는 이러한 교훈을 주셨다. 신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환난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주님은 환난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신자가 주님의 가르침에 확신을 가질 때, 그는 기뻐할 수 있으며 참을 수 있고 주님께 기도할 수 있다.
넷째,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3절)이다. 성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이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시하여 수많은 초대교회들 안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았으며 당시 신자들이 여행을 할 때 적절한 숙박시설이 없었음으로 동료 신자들의 신세를 져야하는 경우가 많았다.더구나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아 유랑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바울은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이들을 대접하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사랑의 삶인 것을 강조한다.
마태복음 25:31-46절에 나타나 있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 나타나 있는 대로, 신자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동료신자를 돌보는 것이 바로 주님을 위한 것이며, 동료신자를 외면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2)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14-21)
바울은 선행문단에서 신자 상호간에 서로 사랑하여야 할 것을 교훈한 다음, 14-21절에서 이 사랑이 불신자에게 특별히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들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 사랑의 교훈은 13-15장에서도 핵심적인 메시지로 등장한다.
14절에서 바울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라”고 교훈한다. 이 교훈은 산상설교에 나타나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예수의 교훈을 상기시킨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교훈을 모범적으로 실천하셨으며(눅 23:34), 스데반은 돌을 맞으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예수의 교훈을 실천하였다. 유대교와 로마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보복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단순히 보복금지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즉 원수까지 사랑한 예수의 삶과 정신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15절의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교훈은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 동참하라는 것이다. 이 교훈은 기독교공동체를 위한 교훈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교훈을 기독교신자 상호간의 것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불신 이웃들에게까지 확대 적용시켜야한다. 원수까지 축복하여야 한다면 불신 이웃의 기쁨과 고난에 함께 동참하여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는 16절의 교훈은 15절의 교훈을 실천함에 있어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16절이 가르치는 그와 같은 겸손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지 않는다면, 15절이 교훈하는 그와 같은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 동참 할 수 없다. 이러한 마음자세는 신자가 예수의 마음을 닮아 갈 때 가질 수 있다.
▶17-21절은 14절에 나타난 박해자들에 대한 교훈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7-18절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악한 일을 했어도 똑같이 악으로 보복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한다. 오히려 모든 사람 앞에서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과 화목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16절). 보복은 더 큰 보복을 야기하지만 보복대신 선한 일을 계속해서 한다면 원수관계가 오히려 친구관계로 바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9-21절은 원수에 대한 적절한 교훈을 주고 있는데, 19절은 소극적인 교훈으로 원수를 직접 갚지 말고 신명기 32:35절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고, 20절은 보다 적극적인 교훈으로 오히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숯불을 그 머리에(원수) 쌓아 놓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원수를 향해 계속해서 사랑의 행위를 할 때, 그로 하여금 스스로 뜨거운 수치감을 느끼게 하여 자신의 잘못을 돌이킬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또 하나는 그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쌓아가게 한다는 의미이다. 어떻든 바울의 요지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선한 일을 통하여 악으로부터 승리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