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인자"의 "들리움"과 "영광"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인자"의 "들리움"과 "영광"
The Lifting-up and the Glory of the Son of Man in the Gospel of John김 선 배 (신약신학 교수)
1. 서 론
요한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기 위해 특별한 형식의 구조와 언어를 사용했으며, 이러한 요한복음서의 신학을 이끌고 가는 것은 인자의 "들리움"에 관한 것이다. 이 어휘와 개념은 요한복음서를 다른 세 복음서와 뚜렷하게 구별되게 하는 동시에 요한복음서의 신학적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다른 복음서와 달리 인자의 죽음을 영광으로 해석하기 위한 요한의 시도들이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요한복음서의 "들리움"은 그의 부활이나 승천을 배제한 십자가의 죽음까지 만을 의미한다.
2. "아버지 됨"과 "아들 됨"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냈고(3:17; 10:36; 17:18), 그는 아버지로부터 왔으며(3:31; 6:33-42), 아버지에게 돌아가려고 한다(13:1-3; 14:28; 16:28; 20:17). 아들은 성육신 하기 전부터 있었지만(8:56-58; 17:5, 24), 예수님의 아들 됨은 주로 그의 지상 사역과 관련된다. 이 아들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일이며,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아들에게 순종하고(3:36), 아들에게 나아 오고(14:6),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다(5:23). 이러한 믿음은 구원과(5:34) 영생을 줄 것이다(6:40, 47; 20:31). 슈나켄버그(R. Schnackenburg)는 아들과 관련된 아버지의 역할을 분류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와서 승귀와 영화롭게 됨을 통해서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간다고 지적하면서 하나님 대신에 아버지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을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아버지-아들"의 구도 속에서 그의 사명과 관련된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13:3). 아들과 관련된 구절들이 주로 내부 논쟁이 아닌 외부 논쟁과 관련된 부분에 등장하는 것은 이 구절들이 그의 정체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크로그(R. Scrogg)는 이러한 것은 요한 공동체와 회당의 논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들" 또는 "아들 됨"이란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기독론적 접근이 있다. 스크로그는 이 관계를 거룩한 실체(the divine reality)의 완전한 계시로 보았으며, 슈나켄버그는 구원에 대한 계시와 교리라는 관점에서 이를 다루고 있고, 카사(R. Kysar)는 복음서 기자와 그리고(또는) 공동체가 이 아들(Son) 과 독생자(only Son) 칭호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즉, 이들이 당시의 입장에서 이전의 아들 칭호에 반영된 것들을--인자가 관련된 들리움, 영화롭게 됨, 올라감, 심판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된 메시아적 칭호, 심판, 그리고 부활을--표현하기 위해 이 칭호들을 주의 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은 이러한 특징적인 아들 칭호를 사용해서 어느 한편의 독특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동일하다는 대담한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아들" 관계는 "하나님-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요한복음서의 특징이며, 아들 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독특한 결속 관계와 관련하여 설명되고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3. "들리움"과 "영광"속에 나타난 "인자"
가. "인자"의 의미
요한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에 비록 "인자"라는 어휘와 개념이 알려져 있었다 할지라도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 어휘였으며, 그 개념에 대한 이해도 명확한 통일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또한 이 어휘는 그 사용에 있어서 처음의 세 복음서와도 다르다. 요한은, 내려오고 올라가는 구도 속에서 인자가 사람들 가운데 있는 이상적인 인물이 아니라 바로 그가 하나님으로서 그의 영광을 보여 준다는 기독론으로 그 인자 개념을 발전시켰다. 롤란드(C. Rowland)는 인자와 관련된 구절들을 승귀(3:14), 선재(3:13; 6:62), 종말론적 역할(5:27; 6:27), 그리고 고백(9:35)으로 분류하면서 이 인자가 이사야 53장에 나타나는 고난받는 종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서에는 인자 칭호가 13번 등장한다(1:51; 3:13, 14; 5:27; 6:27, 53, 62; 8:28; 9:35; 12:33, 34<두 번>). 대부분의 경우 이 칭호는 "들리움"과 영광인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된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셨다. 슈나켄버그는, 요한이 기독론적 칭호를 올라감(6:62), 승귀(3:14; 12:34) 그리고 영화롭게 됨(12:23; 13:31)과 관련하여 대단히 사려 깊게 사용했다고 말한다. 이 칭호가 예수님에 대한 칭호 가운데서 으뜸이라는 밀란드의 주장과 같이, 인자 칭호는 다른 칭호들보다도 그 신학적 기능으로 인해 요한복음서 안에서 더 많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요한이 이 어휘의 전통적인 의미를 알았다고 해도 이 칭호의 의미는 요한의 신학을 위해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인자 칭호의 기능은 이 어휘의 배경이나 또는 독특한 용법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어휘를 왜 예수님이 자신을 지칭하는 어휘로 사용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 칭호를 요한복음서의 로고스나 파라클레토스와 같이 창조적인 의미를 가진 어휘로 간주할 수는 없는가? 예수님 자신이 "들리움"과 영광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이 칭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소홀히 취급될 수 없다. 물론 예수님은 이 칭호를 제 삼인칭으로 사용하셨다. 이 칭호는 1장 51절부터 13장 31절의 이른바 표적 말씀 사이에서만 등장하는데 그 시작은 특히 첫 번째 표적이 등장하기 바로 전이다. 구약이나 또는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 동일한 선례를 찾을 수 있다면, 이 칭호는 요한의 창조적인 어휘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비록 구약이나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 이 어휘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용법은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서의 인자는 비록 구약성서에서 그 희미한 어휘적인 기원을 찾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요한복음서의 인자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요한복음서의 인자는 요한에 의해 이전의 모호한 의미 대신에 보다 구체적이고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의미는 최종적으로 "들리움"과 관련되어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왜냐하면 요한은 인자에 대한 이전의 개념이나 정의보다도 요한복음서 안에서의 그의 역할에 더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 "인자"의 기능
요한복음서의 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독특한 계시임을 반영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든다. 아들과 관련된 칭호나 개념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의 정체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드 종은 요한이 특별히 재해석한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그리스도"라는 어휘보다도 더 중요한 중심적인 칭호라고 주장한다. 1장 41절에 나타나는 메시아 칭호가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에 의해서 사용되었지만 51절에서는 결국 인자에 의해서 보충된다는 것이다.
"인자"라는 칭호의 처음 사용부터 요한은 이 인자를 "올라감"과 "내려감"이라는 주제와 연결시킨다. 어느 의미에서 요한복음서의 중요한 주제들인 로고스, 성육신, 영광, 성령, 영생 그리고 공생애의 시작이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 이전에 나타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첫 번째 표적부터 나사렛 예수의 정체가 점진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요한이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인자의 의미를 변화시켰기 때문에 그 의미를 처음부터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예수님은 1장 51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그리고 메시아와 동일시되지만 누가 인자인지는 알 수가 없으며, 서로 구분되는 관계가 십자가의 죽음까지 전개된다.
요한은 7장 31절과 13장 31절과 3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인자가 아닌 것 같이 삼인칭으로 인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9장 35-37절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로 말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37절,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 구절들에서는 비록 예수님과 소경 된 자와의 직접 대화 형식이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삼인칭으로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 ...."를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 자신과 인자를 관련시키지 않으려는 어색한 회피를 시도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12장 34절에서는 다른 구절들에서보다도 더 복잡한 메시아와 인자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의 "들리움"을 이야기할 때, 무리들이 예수님이 인자로서 메시아인지 아닌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인자나 메시아의 정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들리움"을 빛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하기 시작한다.
인자는 나사렛 예수의 운명을 해석하고 묘사하기 위한 칭호이다. 이 칭호는 십자가를 향해 가는 그의 운명의 여정에서 다른 칭호들의 의미를 흡수하면서 동시에 그 칭호들을 배제시킨다. 12장 34절에서와 같이 요한은 심지어 메시아라는 칭호마저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즉, 인자 칭호는 로고스의 성육신을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연결시키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는 것이다. 슈나켄버그는, 예수님이 그의 완전한 구원 사역의 성취를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로 돌아간다는 구도 속에서 그의 지상 생활 동안 인자로 불렸다고(1:51; 9:35; 12:34) 주장한다. 가나에서의 첫 번째 표적 바로 전에 등장하는 인자는 13장 31절에서 영광에 대한 언급과 함께 사라진다("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뒤이어 바로 그의 고별 강화, 수난,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 등장한다. 인자 칭호가 사라진 후에는 더 이상 표적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격적으로 "들리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인자 칭호는 예수님을 그의 성육신부터 "들리움"까지 연결시키는 하나의 운반 도구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비록 그 적용 범위는 다르지만 이 인자 칭호의 기능적 의무에 동의한다. 인자는 하늘과 땅의 진정한 중재자로서 기능하며, 동시에 죽음은 인자 주제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인자와 관련된 모든 구절들은 명확하게 표현되었든지 아니면 함축되어 있든지 간에 예수님의 죽음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인자라고 불리는 성육신 하신 선 존재(Pre-existent Being)는 하나님이나 또는 메시아와 존재론적으로 동일시되지 않는다. 즉, 그 때까지 그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나 또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가 메시아와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메시아가 되어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자" 개념은 기독론의 발전과 변화에 맞추어 수정되고 변화되었다. 그의 "들리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 인자의 개념은 다른 기독론적인 칭호들, 예를 들어 아들이나 또는 고별 강화에서의 파라클레토스( )와 같은 칭호들로 대치된다. 따라서 요한은 "인자"라는 칭호를 채택하고 그 개념을 변화시켜 그의 기독론을 존재론적 기독론에서 기능적 기독론으로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4. "인자"와 "영광"속에 나타난 "들리움"의 기능
가. "들리움"의 의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 "들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요한이 특징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승귀로 해석했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 "들리움"은 사도행전 2장 33절, 5장 31절 그리고 빌립보서 2장 9절 등에 등장하는 승귀와는 구별된다. 그의 죽음의 성격에 대한 암시는 3장에서 얻을 수 있으며, 이 죽음은 3장 12절과 12장 33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다가 18장 32절에서 성취된다.
"들리움"은 고전 헬라어나 또는 코이네 헬라어에서는 등장하지 않으며 단지 칠십인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들리움"의 중요한 의미는 나사렛 예수가 이 세상(땅)에서 죽임을 당하며 동시에 새로운 통치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들리움"과 그 목적을 잘 설명해 주는 12장 32절과 33절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을 그의 성육신부터 십자가의 죽음까지 점진적으로 드러내 준다. 이 과정을 "들리움"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영원에서 내려와 다시 하늘 보좌에 이르는 올라감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나 "들리움"이 부활과 승천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으며, 실제로 대다수 학자들은 십자가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하나의 과정으로 간주한다(브라운, 슈나켄버그, 비어즐리-머레이 등). 그러나 이러한 결론들은 "들리움"과 올라감의 관계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요한복음서에 나타나는 구절들의 직접적인 증거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3-16(민수기 21:4-9): 예수님은 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영생"이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그의 "들리움"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근원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8:28: 25절의 유대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정체와 관련된 것으로 누가 인자를 들것인지 밝혀져 있다.
12:23-41: 3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임금은 쫓겨나고 새로운 임금이 권좌에 오를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는 무덤이 아닌 땅에서( ) 들리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부활이 아닌 십자가의 죽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능동태(8:28)와 수동태(3:14; 12:32)의 형식에서 중요성을 찾으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것은 수동태 형식이 하나님의 섭리를 반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들의 태(voice)는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나 또는 섭리를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 죽음의 발전과 목적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6장 9절과10절의 인용은 단지 고난의 종이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종의 영광을 아들의 영광과 일치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들리움"은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할 것이다(12:32).
슈나켄버그는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비참한 굴욕을 나타냈으며, 후에 예수님이 주님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되는 승귀가 덧붙여졌을 뿐이나, 그러나 여기에서는 승귀의 기독론이 아닌 시편 110편 1절이 관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들리움"은 그의 부활과 승천을 포함하지 않는 십자가의 죽음까지를 의미하며, 이 "들리움"의 완성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서이다. 요한은 십자가의 죽음을 다른 기독론적 요소들보다도 더 중요하게 취급한다. 만일 그가 부활이나 승천과 같은 요소들을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시켰다면 그의 기독론은 모호해졌을 것이며 십자가 죽음의 중요성은 희석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한은 십자가의 죽음을 다른 요소들과 구별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 자체는 요한복음서에서 돌출 되는 요소가 되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이 "들리움"이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즉, 이 "들리움"은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 가운데 들리는 것이다. 리차드(E. Richard)는 요한복음서에서 사용된 모호하거나 이중적인 표현들은 오해, 아이러니, 일반적인 context 속에서 전문적인 어휘 사용, 특정한 context 속에서 모호한 어휘 사용, 비유적인 표현, 기독론적 칭호들, 특별한 문학적 기교들을 초월하는 이중적인 의미들이라고 분류한다. 이에 대해 이 "들리움"이라는 단어가 그의 죽음 때까지 오해되는 단어라고 하는 토레이(C. C. Torrey)의 지적은 이 단어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들리움"은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의 수난은 그의 일련의 "들리움"의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과정은 13장 31절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9장 30절에서 끝난다.
나. "들리움"의 기능
"들리움"은 인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3:14; 8:28; 12:32, 34). 12장 37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 구절은 앞에 있었던 표적들에 대한 결론이며, 이어지는 구절들은 예수님에 대한 영접(믿음)이나 거절과 관련된다. 이 표적에 관한 결론 구절이 언급된 뒤로는 인자 칭호가 사라지며 "들리움"과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13:2, 7)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인자가 영화롭게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신다(13:31). 그리고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기 직전에 밖으로 나간다(13:30). 이 "들리움"의 과정은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존재론적 일치에 대한 전주곡이며, 인자의 운명은 "들리움"이라는 어휘를 잘 설명해 준다. "들리움"은 비유적으로 인자, "들리움," 그리고 영광 이 세 가지의 삼각 구조 가운데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어휘에 대한 배경은 구약성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어즐리-머레이는 종의 노래(the Servant song)와 요한복음서가 이것을 서로 다르게 적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전자[종의 노래]가 종의 고난과 죽음 뒤에 승귀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이사야 53:10-12에 종의 부활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주목하라), 요한복음서의 들리움과 영화롭게 됨은 예수님의 죽음과 승귀를 한 사건에 대한 분리할 수 없는 두 단계로 묘사한다"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비어즐리-머레이는 십자가의 죽음, 부활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심을 한 사건의 연속적인 단계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들리움"에 대한 구절들 가운데서 부활에 대한 언급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같은 사건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또한 비록 부활이 이사야 52장 10-12절에 함축되어 있다 할지라도 중요한 분위기는 종의 고난이다. 이 "들리움"이라는 어휘는 명확하게 고난을 강조하며 극적인 반전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 52장 13절의 " "는 고난과 죽음에 관련된 것이며, 그의 고난과 죽음의 결과로 그가 영화롭게 된 것이다. 이 두 어휘는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융합된다. 따라서 "들리움"은 고난의 마침이며, 이 마침은 새롭게 부여된 예수님의 정체를 알게 해 준다. 믹스(W. A. Meeks)는 이 들리움이 예수님의 정체를 밝히는 극적인 장치라고 언급한다(8:28; 19:17-22). 팸먼트는 "들리움"과 영광이 신학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었다고 주장한다: "동사 hypsoo를 사용함으로 요한은 들리움이 예수님의 승귀라는 개념도 표현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 단어를 doxazo와 동의어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십 자가에 달리신 인자가 모든 사람에게(12:32) 영생을 준다는(3:14) 믿음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의 수난과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한 사건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들리움"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의 절정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들리움"이라는 어휘는 중립적이며,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에 자연스럽게 그리고 이 둘의 가치와 기능을 손상시키지 않고 연결시킨다. 즉, "들리움"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성격과 의미를 결합시키는 관로(pipeline)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5. "인자"와 "들리움"속에 나타난 "영광"
가. "영광"의 의미
1장 14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영광( )은 요한복음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한결같이 "들리움"을 향하고 있다. 이 영광은 육신( )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출현을 가리킨다. 거룩한 존재로서의 영광은 "들리움"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가 점차로 밝히 드러남에 따라 영광 역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거룩한 존재는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며 그리스도는 세상에 완전한 모습으로 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서 서언에서 등장했던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대미를 장식하기 때문에 더이상 "영광"이라는 어휘가 이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영생에 들어가는 문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은 성육신의 목표 지점이다. 세상이 나사렛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성육신부터 십자가의 죽음까지이다. 물론 이것은 요한복음서에서 "들리움"( )과 올라감( )이 구별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비록 이사야서 52장 13절에서 "들리움"이 영광과 관련되지만 요한복음서의 "들리움"에 관한 구절들은 영광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인자 구절들은 영광과 "들리움"에 동시에 관련되어 있다. 오직 인자 칭호만이 "들리움"과 영광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자의 기능이 "들리움"과 영광 사이의 관계성을 제공해 줄뿐만 아니라 밝혀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광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브래처는 와 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범주로 분류한다:
(1) 영예, 명성, 명망, 유명, 명예롭게 하는, 찬양하는(5:41, 44; 7:18a, b; 8:50, 54; 12:43; 21:9). (2) 하나님의 영광(11:4, 40; 12:28a, b; 15:8; 13:31, 32; 14:13; 17:1, 4). (3) 예수님의 영광(17:22, 24; 1:14; 2:11; 12:41; 17:5b; 11:4; 12:23; 13:31a, 32; 16:14; 17:1a, 5a, 10; 7:39; 12:16). (4)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영광을 주심(17:22).
브래처는 또한 "(2)번, (3)번, 그리고 (4)번에 언급된 구절들은 이러한 두 가지 단어들을 적절하게 표현해 주지 못하고 있으며 요한복음서에서 이 두 단어들은 새로운 차원을 부여받기 때문에 이 단어들의 새로운 의미를 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신약성서에서 와 의 의미는 일반 헬라 문학에서의 의미가 아니라 헬라어 성경의 의미로서, 히브리어 뿌리인 에서 기원하는 번역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처는 "......많은 구절들에서 는 능력, 위엄, 장엄, 영예, 위대함 등보다 더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적인 존재(the divine being), 신적인 본질(the divine nature), 신성(divinity), 신적인 인물(the divine one) 등을 의미한다"라고 주장한다. 키텔도 이 단어가 원래 의미인 "견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평판, 명예, 광휘, 영광,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설명한다. 인자의 들리움은 하나님의 영화롭게 됨과 그리스도인 예수님에 대한 계시의 성취를 의미한다. 인자와 관련된 영광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다. 그 영광은 이미 서언에서 선포되었다(1:14). 그러므로 인자와 관련된 영광들은 신적인 존재, 신적인 본질, 신성, 그리고 신적인 인물 등을 언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에 포함된 전통적인 자료를 사용했지만 그러나 이 "영광"이라는 어휘가 바로 그의 창조적인 신학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영광"의 기능
"들리움"과 인자는 영광에 수렴된다. 인자는 "들리움"을 받을 것이고 또한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인자와 "들리움"은 수난의 시작과 함께 사라지며, "영광"이라는 어휘는 그의 "들리움" 기간 동안 인자의 죽음에 대한 해석으로만 사용된다( -17:5, 22, 24; -12:16, 23, 28; 13:31, 32; 14:13; 15:8; 16:14; 17:1, 4, 5, 10).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그의 죽음에 대한 해석 역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물론 "영광"이라는 어휘는 그의 "들리움" 동안에 다르게 해석된다. 요한은 7장 39절과 12장 16절에서 이 어휘를 뒤에 있게 될 사건에 비추어 해석한다. 팸먼트(M. Pamment)는 "들리움"과 영광을 내려옴과 올라감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버케트(D. Burkett)는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첫 번째 영화롭게 됨이고 뒤이어 바로 있게 되는 부활이 두 번째 단계의 영광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지나치게 영광을 확대 해석한 것이며, 팸먼트 역시 비록 첫 번째 단계인 예수님의 죽음을 영화롭게 됨으로 보지만 그러나 두 번째 단계로서 하늘로의 등극을 전제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이 영화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희석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지나친 구분이나 단계 설정은 타당하지 않으며, "내려옴"과 "올라감"이라는 구도 속에서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로서 인자와 "들리움"의 관계 속에서 노출되는 현상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6. 결론: "들리움"을 통한 "인자"의 "영광"
나사렛 예수의 "들리움"의 과정이 고조됨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출현은 더욱 분명하게 되어 간다. 팸먼트는 2장 11절의,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독자들은 비록 예수님의 육체적 출현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장엄과 능력을 기대할 것이라고 말한다. "들리움"은 인자로서 일하는 나사렛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들리움"의 완성(성취)이기 때문이다. 영광은 인자에게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은 영광의 완전한 계시이며 새로운 통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들리움"은 십자가의 죽음이고 십자가의 죽음은 나사렛 예수의 희생적 죽음이며, 그의 희생적 죽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의 성취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은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가 동일시되는 장소이며, 다시 말해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순간이며 여기에서 마침내 하나님(영광)이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들리움"은 예수님의 수난부터 그의 십자가 죽음까지 통합시키는 역사적 사건이며, 영광은 그의 "들리움"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신학적 해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과 "들리움"이 무엇을 의미하고 지시하는지는 나사렛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까지 알 수가 없다. 12장 16절에서 요한이,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고 기록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 속에 그의 "들리움"은 명확히 드러나 있고, 영광은 함축되어 완전하게 밝혀졌다. 이 16절의 말씀을 읽게 될 때 누구든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어느 특별한 사건을 기대할 것이다.
요한은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와의 불일치와 일치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해결하며, "들리움"의 진행을 영광과 관련지어 해석한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의미 있게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자의 "들리움"으로, 그리고 이 "들리움"을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사건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영광(하나님)을 보는 것이다(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