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준비하신 아침식사(요 21:8-14)

예수님이 준비하신 아침식사(요 21:8-14)
저자는 베드로가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예수님에게 가는 동안에 다른 제자들의 행동을 설명한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21:8). “작은 배”(πλοιάριον)는 ‘배’(πλοῖον)와 동의어적으로 사용한다(6:24; 눅 5:2). 그러나 요한의 상징성에 주목하는 학자들은 배는 사도적 공동체들을 포함하여 보다 더 큰 의미의 교회를 가리키고 작은 배는 다른 공동체들과 떨어져 있는 요한공동체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해변에서 제자들이 타고 있던 작은 배까지의 거리에 관한 언급은 사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려 한다는 것 외에는 의미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 그 거리가 비교적 가까웠기 때문에, 배 안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인식하기에 충분한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자는 베드로의 행동과 다른 제자들의 행동을 대조시킨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던 일을 마치려 하기보다는 주님 앞에 먼저 나가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 첫 번째가 되려는 마음이 강했던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 사랑 받은 제자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은 물고기가 가득 찬 그물을 끌고 해안에 올라옴으로 그들의 임무를 완수했다.
저자는 제자들이 배를 육지에 대고 올라온 상황을 묘사한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21:9). 그들이 육지에 올라감으로(ἀπὲβησαν) 그들의 향해가 끝났다. 밤에 물고기를 잡는 그들의 모험은 밤중의 빈 손에서 아침의 풍성함으로 변경되었다. 그들이 육지에 올라갔을 때, 상징적 함축으로 가득한 광경을 보았다: 숯불과 생선과 떡. 숯불(ἀνθρακιαν)이란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이곳과 예수님의 심문 때에 대제사장의 뜰에서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쬐던 때에 나온다(18:18). 물고기와 떡은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있었던 오병이어 사건을 상기시킨다(6:9, 11).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의 풍부함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의 풍부함과 오병이어 사건에서 떡과 물고기의 풍부함과 연결된다.
물고기를 가리키는 단어가 ἰχθύς에서 ὀψάριον으로 변경되었다. 전자가 최초 기독교인들의 중심적 신앙을 담은 상징적 단어인 반면, 후자는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에 초점을 둔다. 전자가 제자들의 사명의 결과로 얻어지는 신앙공동체의 회원들을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공동체 식사로서의 물고기를 강조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두 가지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먼저 그는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명을 감당하는 현장에서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시며 다음에 수고하는 그들을 위하여 하늘의 양식을 공급한다.
저자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21:10). 앞에서 숯불에 이미 물고기가 놓여 있었다고 언급되었는데, 왜 예수님은 지금 잡은 물고기들 중에서 더 갖고 오라고 명하시는가? 숯불에 놓여 있은 물고기는 단수로 나오고 여기서 지금 잡은 생선들은 복수로 나온다: 지금 잡은 생선들 중에서 (일부를) 가져 오라(ἐνέγκατε ἀπὸ τῶν ὀψαρίων).
제자들의 숫자는 일곱이며 숯불에 놓여 있은 물고기는 한 마리이기 때문에, 더 가져오라고 하신 것인가? 이 구절도 이 사건 전체의 상징성에 기초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사건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하는 선교의 사명을 상징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식사는 공동체가 참여하는 성례전적이며 교제의 식사를 가리킨다. 숯불에 놓인 물고기가 이미 예수님과 함께 모인 제자들을 가리킨다면,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들은 그들의 선교 활동을 통하여 신앙공동체에 들어오는 신입 교인들을 상징한다. 이 장면은 초대 교회들이 감당한 선교활동과 그 활동의 결과를 놓고 전체 교회가 주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초대 교회들의 예배 상황을 반영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21:11). 이 사건의 상징성이 이 구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다른 제자들이 그물을 해안까지 끌어 왔지만, 그것을 땅에 끌어올린 사람은 베드로였다. “끌어올리다”(εἵλκυσεν)는 동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끄는 것(12:32)과 하나님이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오는 것(6:44)에 사용되었다.
물고기를 가리키는 단어도 음식의 물고기(ὀψάριον)에서 상징적 물고기(ἰχθύς)로 다시 변경되었다. 이 단어들의 이러한 상징성을 고려하면, 이것은 베드로의 목회 지도력에 관한 의미를 전달한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이 연합해서도 할 수 없던 일을 혼자서 감당한 곧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예수님에게로 이끄는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 놀라운 지도력은 물고기에 관한 묘사를 “큰 물고기”(ἰχύων μεάλων)로 바꾼 것에서도 표현된다. 요한 공동체는 지금까지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지도를 받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추구해 왔는데, 이제 베드로의 역할과 그가 대표하는 사도적 교회들을 용인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물고기의 숫자를 153마리로 구체적으로 밝힌 것에는 저자의 의도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 숫자의 상징성에 관하여 제롬과 어거스틴 이래 많은 견해들이 제기되었다(cf. Schnackenburg, 1982, Ⅲ:357-76). 예를 들어, 제롬은 에스겔 47:6-12의 해석에서 153을 물고기의 종류를 보고 그것은 충만의 숫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어거스틴은 153 = 150(3 x 50)+ 3(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숫자에 상징적 의미들을 부여하는 해석들(게마트리아)은 어떤 확실한 결론에 이를 수 없고 주관적 해석에 치우치기 쉽다. 그래서 상징적 해석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숫자의 정확한 보고는 그 사건에 대한 목격자의 정확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의도되었으며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다는 언급도 사실적 묘사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cf. Brown, 1970, Ⅱ:1076; Smith, 1999, 393).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사건의 상징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그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한 그물에 큰 물고기들이 가득 찼다는 것과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표현들 속에서 저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모든 인종과 계급과 성별에서 예수님께로 이끌려온 모든 신자들을 품을 수 있는 하나의 보편적 기독교 공동체를 가리킬 수 있다.
특히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중심한 공동체의 일치와 연합을 암시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속옷이 호지 않고 통으로 되어 있었다는 표현과 맥락을 같이한다. 예수님은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을 것을 말했으며(10:16), 또 제자들이 하나가 될 것을 기도했다(17:21-23). 베드로는 큰 물고기들로 가득 찬 찢어지지 않은 그물을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왔다. 이것은 성공적 선교의 모형으로서 많은 숫자의 열매와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가 된 공동체를 상징한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큰 물고기들로 가득 찬 그물을 끌어온 상황에서 그가 준비한 아침 식사에 제자들을 초대한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21:12). 예수님께서 준비한 조반과 관련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거기에 이미 물고기와 떡이 있었기 때문에(v.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잡은 고기 얼마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신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 이야기 속에 두 단계의 전승이 포함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잡은 것과 공동체 식사. 누가의 이야기(눅 5:1-11)에는 물고기를 잡는 것만 다루어지는데, 누가는 나중에 부활의 예수님께서 식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을 전달한다(눅 24:30-35, 41-42).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는 예수님의 지시와 베드로의 반응(21:10-11)은 두 단계를 하나로 연결한다. 학자들은 요한이 이전의 독립된 두 이야기들을 하나로 만들었든지 혹은 그의 자료에 이미 하나로 연결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cf. Brown, 1994, 1085). 결합된 두 이야기는 선교의 중요성은 물론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연합과 교제가 성공적인 선교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조반을 먹는다”(ἀριστήσατε)는 동사는 다른 곳에서는 하루의 중요한 식사를 가리키지만(예, 눅 11:37), 여기서는 아침 식사를 가리킨다. 예수님과 함께 먹은 저녁 식사(δείπνου, 12:2; 13:4)가 그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과 달리, 아침 식사는 죽음의 어두음이 물러가고 부활의 빛 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나누는 새 세대를 위한 잔치였다. “조반을 먹어라”는 명령법의 시제가 부정과거인 것도 바로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과 함께 가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가리킨다. “당신이 누구냐”(σὺ τίς εἶ)는 질문은 예수님의 교훈을 끝까지 거부한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한 질문(8:25)이며 유대인 당국자들에게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 침례요한의 정체를 알기 위하여 한 질문(1:19)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진정으로 알려고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던진 부정적 의도의 질문이었다. 제자들 중에는 감히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부활의 주님을 체험적으로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확신은 그 사랑 받은 제자로부터 시작하여 베드로에게로 그리고 이제 모든 제자들에게로 전해졌다.
저자는 현현 이야기를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서 알아보는 전승과 결합시킨다(21:9, 12-14). 식사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게 된 것은 현현 이야기의 한 중요한 소재(motif)이다. 그것은 부활의 예수님께서 식사 자리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현현하셨다는 것 곧 그들은 식사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달한다(눅 24:31, 35). 누가는 제자들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하여 예수님 자신이 생선을 잡수신 것을 언급한다(눅 24:43). 공생애의 예수님이 식사 자리에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던 것과 같이, 부활의 예수님도 공동체의 식사 자리에서 그의 임재와 현존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직접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신다: “예수님께서 가셔서 EJrdmf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21:13). 예수님의 행위가 세 개의 동사를 통하여 표현된다: 예수님은 가서(ἔρχεται), 떡을 가져다가(λαμβάνει), 그들에게 주신다(δίδωσιν). 이 식사의 주관자는 예수님 자신이다. 떡을 가져다가 주는 장면은 유대인의 식사 자리에서 축복을 선언하는 주인의 활동을 가리킨다. 세 동사 모두 현재 시제로 나온다. 제자들이 모든 자리에 주님 자신이 오셔서 떡과 생선을 제자들에게 주신다. 떡과 물고기는 오병이어 사건에서 축복을 받은 음식이다. 그 사건도 디베랴 바다 근처에서 일어났는데, 예수님께서 떡을 잡고 축사하시며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다(6:11). 그 사건에는 분명히 초기 기독교인들이 실천했던 성례전적 함축이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병이어 사건과는 달리, ‘축사하다’(εὐχαιστήσας)는 동사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성례전적 의미를 포함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저자는 현재 시제의 동사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이루어졌던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교제가 그의 부활 이후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또 나아가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이 현현 이야기들이 의도하는 중심적 교훈이며 부활의 주님이 그들과 새로운 형태로 함께 거하신다는 요한 신학의 표현이기도 하다(14:16-23). 이것은 또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베푼 식사 자리에 지금 참여하도록 초청한다.
저자는 이 장면의 결론을 내리며 예수님의 세 번째 현현을 강조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21:14). 저자는 이 사건을 제자들 편에서의 현현의 경험으로 묘사한다. 저자는 소개문(21:1)에서는 부활의 주님이 그 자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주님의 활동으로 표현한 반면, 여기서는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혹은 ‘보이신’ 사건으로 제시한다. 그 현현을 세 번째로 규정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현한 것을 계산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제자들에게 현현한 것만을 계산했다.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여자이기 때문에 부활의 증인으로서 무효하다는 의미를 반영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예수님의 현현을 이해하는 요한의 독특한 입장을 반영한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현하신 것은 예수님의 올리우심 이전의 현현이며 그래서 그것은 그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심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될 예수님의 온전한 존재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현현하신 예수님은 요한에 따르면, 그의 올리우심이 오나성되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현현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가 공생애에서 말씀하셨던 모든 것을 계속하시고 재현하시는 분으로서 오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갈릴리 바닷가에서의 현현은 세 번째 현현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입장에서 세 번째라는 언급은 그의 강조적 표현을 반영한다. 유대교 문화에서 어떤 것을 세 번씩이나 말하는 것은 그것의 중대함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현현은 예수님의 복음 곧 그의 존재와 그의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현현의 경험을 통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복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현현의 경험은 신앙과 신학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자들은 현현의 경험에 기초하여 부활신앙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시며 그가 공생애에서 시작하셨던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계속하고 계신다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 부활 신앙은 예수님 그리스도와 관계된 모든 것을 새롭게 이해하는 출발점과 중심점이 되었다. 따라서 요한은 올리우신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현현하심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이것을 확증해 주셨다는 것과 제자들은 세 번에 걸쳐 현현의 경험을 통하여 이제 확고부동한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것은 부활의 예수님께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다는 누가의 언급과 맥락을 같이한다(행 1:3). 요한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확고부동한 부활 신앙을 갖게 된 베드로와 개인적으로 대면하시면서 그에게 목자의 사명을 주시는 것으로 제시한다.

<초대교회에서 이 그림 '떡과 물고기"는 "성찬"을 상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