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양을 치라(요 21: 15-23)
이 장면은 갈릴리 바다에서 많은 고기를 잡고 해변에서 식사를 나누던 이전 장면의 연속이지만 초점이 약간 변경되었다. 이 장면에서는 부활의 주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가 중심을 이루며 그 대화의 내용은 주로 베드로의 미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초기 전승들은 그의 첫 번째 현현이 베드로에게 이루어진 것으로 전한다(고전 15:5; 막 16:&; 눅 24:34).
이 장면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를 부인한 것에 상응하는 그의 회복을 다룬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그가 예수를 사랑하는가를 세 번 질문하고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세 번 확인시키며, 예수는 베드로가 그의 양을 먹이도록 세 번 위임한다. 예수의 삼중 질문과 그 후의 삼중 명령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것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13:38; 18:17; 25-27; cf. 막 14:66-72 parr.). 그 연결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보기는 더 어렵다. 원문에는 세 번에 걸친 질문과 대답에서 단어들이 변경되었고 그래서 이 변경이 주는 의미의 차이에 관한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다. 요한복음 21:15-17에서 변경된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예수의 질문 |
베드로의 대답 |
사명의 위임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ἀγαπᾷς με |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φιλῶ σε |
내 어린양을 먹이라 βόσκε τὰ ἀρνία μου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ἀγαπᾷς με |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φιλῶ σε |
내 양을 치라 ποίμαινε τὰ πρόβατά μου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φιλεῖς με |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φιλῶ σε |
내 양을 먹이라 βόσκε τὰ πρόβατά μου |
예수의 연속된 질문이 그에 대한 베드로의 관계 회복에 역점을 둔 반면, 예수의 명령은 베드로의 목회자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과 관련하여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위와 마태복음 16:18-19에서 그에게 주신 예수의 말씀 사이의 관계도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20:23에서는 죄사함을 수여하는 권위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다. 이 복음서에서는 물론 다른 복음서들과 바울 서신들에서 언급되는 열두 제자 중에 베드로가 지도자적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cf. 갈 1:18-2:14; 고전 1:12-13; 9:5). 신약성서 중에 두 서신들은 베드로의 작품으로 인정되었고 고대의 전승은 마가복음을 그의 이름과 연결시킨다. 로마 가톨릭교 전통에서 베드로는 로마의 주교이며 최초의 교황이었다. 베드로에 관한 이러한 전승들의 발전은 신약성경의 일정 부분에 기초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본문도 베드로에 관하여 발전되고 있던 전승의 한 부분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베드로의 역할이 세 번째 현현의 경험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전한다. 저자는 특히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가 어떻게 예수와의 관계를 회복했을 뿐 아니라 예수를 따라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죽게 되었는가를 제시한다. 누가도 베드로가 부인하는 것에 대한 예고와 함께 “돌아서서 내 형제들을 굳게 하라”는 예수의 지시를 전달한다(눅 22:31-34). 이 돌아섬이 베드로를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의 위치에 서도록 만들었다(고전15:5; 눅 24:34). 베드로와 함께 그 사랑 받은 제자의 특별한 위치도 소개된다.
1.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21:15-19)
저자는 먼저 예수와 첫 번째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을 전한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꼐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2:15). 이 장면의 엄숙함은 베드로를 부르는 호칭에서부터 표현된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베드로가 처음 예수에게 나왔을 때 사용된 호칭이다(1:42). 그 때 예수는 베드로가 장차 게바가 될 것 곧 교회의 큰 지도자가 될 것을 예고했다. 그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를 따르는 과정에서 실패와 고통의 괴로움을 경험한 후 부활의 예수를 세 번째 대면하는 가운데서 성취되기 시작한다. 예수는 먼저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를 향한 그의 신앙과 헌신의 자세를 확립하도록 질문한다. 예수의 질문은 “너와 나”라는 예수와 베드로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토대로 제시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서 ‘나’는 더 이상 공생애의 예수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화육하신 로고스로서 이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제시된 예수의 존재 전체로서의 나(ἐγώ εἰμι)이다. ‘나’는 선재와 화육과 승귀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전체 곧 하나님의 말씀(λόγος)으로서 태초 이전부터 계셨고 창조 활동에도 참여하셨으며 화육하여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과 올리우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로 복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나’이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나아가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알아야 한다. 마태는 베드로가 이러한 신앙을 예수의 공생애에서 고백한 것으로 전한다(마 16:16).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신앙의 국면을 나타낸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예수의 말씀에서도 제시된 것과 같이(막 8:35 parr.),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헌신과 희생과 순종을 가리킨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상응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cf. 막 12:29-30 parr.).
이런 점에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동일하다(14:15; 15:10). ‘사랑하다’(ἀγαπᾶν)는 동사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ἠγάπησεν, 3:16)는 말씀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께서 그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아야 한다. 자기 양들을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오셨고 자기 생명까지 내어놓으신 예수의 사랑을 알 때, 베드로는 예수를 사랑하고 또 그의 양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는 “이 사람들보다 더”(πλέον τούτων)라는 어구가 추가되었다. “이 사람들”로 번역된 지시대명사(τούτων)는 남성일 수도 있고 중성일 수도 있으며, 그래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를 사랑하는가; (2)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를 사랑하는가; (3) 베드로가 이것들(고기 잡는 일과 같은 일상의 일들과 가치들)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가. (3)에 관한 지지는 거의 없다. (2)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소수 있다. 예를 들어, 위데링톤(Witherington, 1995, 356)은 예수의 질문을 다른 사람들과 관계된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1)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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