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원어 강해

요한복음 21장 원어 강해
요 21:1~11 예수의 부활하심과 제자들을 만나심
예수의 부활하심과 제자들을 만나심
예수께선 갈릴리에서 다시 보겠다던 약속을 지키셨다. 예수께선 다른 장소에서 모든 사람들을 한꺼번에 대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사역하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그곳에 다시 오신 것이다.
1. 디베랴 바다에 오신 부활한 예수(1-4절)
1) 디베랴에서 자신을 나타내심
(Meta; tau'ta ejfanevrwsen eJauto;n pavlin oJ jIhsou'" toi'" maqhtai'" ejpi; th'" qalavssh" th'" Tiberiavdo":메타 타우타 에파네로센 헤아우톤 팔린 호 예수스 토이스 마데타이스 에피 테스 달랏세스 테스 티베리아도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1절)
메타 타우타(Meta; tau'ta:그 후에)는 사도 요한이 새로운 내용을 시작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 도입구이다(A.T.Robertson). 에파네로센(ejfanevrwsen:나타내셨으니)이란 동사는 성육신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 지상에서의 사역들 그리고 다시오실재림의 현현을 표현할 때만 사용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이 단어의 사용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W.Hendriksen). 본문은 갈릴리 바다를 대신하여 갈릴리(지역)의 수도인 디베랴의 이름을 빌어 디베랴 바다로 표현하고 있으나 양자는 동일한 장소이다. 디베랴란 갈릴리 바다 서쪽에 헤롯 안디바가 A.D.16-22년경 지어 로마의 디베료(Tiberius) 황제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역이다.
예수께선 고난을 받은 후 부활하여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루기 위해 부활한 영광의 몸을 가지고 갈릴리에 오신 것이다.
2) 고기 잡으러 가는 제자들
(JUpavgw aJlieuvein. levgousin aujtw'/, jErcovmeqa kai; hJmei'" su;n soiv. ... kai; ejn ejkeivnh/ th'/ nukti; ejpivasan oujdevn.:휘파고 할리유에인 레구신 아우토 에르코메다 카이 헤메이스 쉰 소이…카이 엔 에케네이 테 뉘크티 에피아산 우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하니…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3절)
할리유에인(aJlieuvein:물고기 잡으러)은 현재형 동사와 함께 쓰여 목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원문은 '고기잡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목적은 단순히 고기잡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소식을 이미 들었기에 예수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갈릴리로 갔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어부가 아니었던 다른 제자들도 고기잡으러 갔다는 점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S.R.Driver).
제자들이 밤을 세워 한 노력은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이것은 처음에 실패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예수가 함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예수 없는 노력은 헛된 노력일 뿐임을 뒤의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된다(A.Plummer). 오직 예수와 함께 할 때만 올바른 성공을 거둘 수 있다.
3)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
(prwi?a" de h[dh genomevnh" e[sth jIhsou'" eij" to;n aijgialovn: ouj mevntoi h[/deisan oiJ maqhtai; o{ti jIhsou'" ejstin.:프로이아스 데 에데 게노메네스 에스테 예수스 에이스 톤 아이기알론 우 멘토이 에데이산 호이 마데타이 호티 예수스 에스틴: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4절)
게노메네스(genomevnh":새어갈 때에)는 점차적으로 날이 밝아오는 과정을 묘사하는 현재분사형이다(W.Bauer). 본문은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①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②날이 아직 밝아오는 새벽녘이었기 때문에, ③부활한 주의 모습이 영광스러웠기 때문이라는 등의 의견이 있는데, 보편적으로 ③의 의견을 선택하고 있다. 즉 예수님이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빌3:21).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도 동일한 이유 때문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눅24:13-32).
육신의 눈만으로는 영광의 주를 알아볼 수 없다. 육신의 제자 모두가 반드시 영적인 제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예수를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일 것이다.
2. 많은 고기를 잡음(5-7절)
1)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
(levgei oun aujtoi'" 팷J? jIhsou'", Paidiva, mhv ti prosfavgion e[cete_ ajpekrivqhsan aujtw'/, Ou[.:레게이 운 아우토이스 [호] 예수스 파이디아메 티 프로스파기온 에케테 아페크리데산 아우토 우: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5절)
예수께선 제자들에게 보통 테크니아(tekniva:소자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으며 본문의 파이디아(Paidiva)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으셨다. 파이디아(Paidiva:얘들아)는 주로 평민들이 사용하던 친근한 호칭으로서(Liddle & Scott), '내 아들들아'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정답고 다정한 부름이다. 메 티(mhv ti: 있느냐)라는 표현은 부정의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 표현으로서, '없겠지?'라는 분위기가 더 짙다(A.T.Robertson).
예수께선 밤새 노력하고 애썼으나 아무런 소득과 성과 없이 실패한 제자들에게 더욱더 자상하고 다정스럽게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의 실패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시고 그들에게 물어보셨다. 우리 주님은 주님 없이 실패한 모든 제자들에게 지금도 자상한 목소리로 부르고 또한 묻고 계신다.
2) 오른편으로 던지라
(Bavlete eij" ta; dexia; mevrh tou' ploivou to; divktuon, kai; euJrhvsete. e[balon oun, kai; oujkevti aujto; eJlkuvsai i[scuon ajpo; tou' plhvqou" tw'n ijcquvwn.:발레테 에이스 타 덱시아 메레 투 플로이우 토 딕튀온 카이 휴레세테 에발론 운 카이 우케티 아우토 헬퀴사리 이스퀴온 아포 투 플레두스 톤 이크뒤온: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6절)
헬퀴사이 이크뒤온(eJlkuvsai i[scuon: 들 수)에서 이크뒤온(ijcquvwn:수)은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서의 동작의 생생한 묘사를 위해서 사용했다. 요한은 들어올리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자 이런 형태를 사용한 것이다(H.W.Smyth). 갈릴리 바다에서는 종종 고기 떼가 물결에 밀려 들어오는 것이 해변에 있는 사람에게 보이곤 한다. 그러므로 배의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씀을 예수가 밀려오는 고기 떼를 보고 알려 준 사건은 예수의 기적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L.Morris).
예수께선 처음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을 통해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사건을 통해 지금 다시 부활 이후에 자신의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고자 하고 계신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통해 과거를 회상했을 것이다. 그리곤 가슴 벅찬 감격과 흥분으로 예수님이심을 예감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3) 주께로 뛰어가는 베드로
( JO kuvriov" ejstin. Sivmwn oun Pevtro", ajkouvsa" o{ti oJ kuvriov" ejstin, to;n ejpenduvthn diezwvsato, hn ga;r gumnov", kai; e[balen eJauto;n eij" th;n qavlassan::호 퀴리오스 에스틴 시몬 톤 에펜뒤텐 디에조사토 엔 가르 귐노스 카이 에발렌 헤아우톤 에이스 텐 달랏산: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7절)
호 퀴리오스( JO kuvriov":주)라는 사도 요한의 외침은 정관사를 가지고 있다. 요한은 '그 주님이시다'라고 외친 것이다. 제자들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바로 그 영광의 주님이라고 외친 것이다. 요한이 '선생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소유권자'라는 의미를 갖는 퀴리오스(kuvriov":주)라고 말한 것은 예수를 향한 정확한 호칭이었다.
베드로를 처음으로 부르실때에도 예수께선 많은 고기를 잡는 기적을 베푸셨다. 그때 베드로가 했던 말은 죄인인 자기를 떠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와 똑같은 기적을 다시 베푸신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 가고 있다. 그토록 고대하고 바라던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또한 물에 들어갈 때에는 입고 있던 옷도 벗어야 할텐데 옷을 갖추어 입는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주님을 사모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J.H.Bernard).
3. 생선을 좀 가져오라(8-11절)
1) 다른 제자들도 올라옴
(wJ" oun ajpevbhsan eij" th;n gh'n blevpousin ajnqrakia;n keimevnhn kai; ojyavrion ejpikeivmenon kai; a[rton.:호스 운 아페베산 에이스 텐 겐 블레푸신 안드라키안 케이메넨 카이 옵사리온 에피케이메논 카이 아르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8,9절)
블레푸신(blevpousin:보니)이라는 현재 시제 사용은 역사적 현재 시상으로서 생생한 묘사를 위해서 과거의 사실을 현재로 표현한 것이다(H.W.Smyth). 케이메넨(keimevnhn:놓였고)도 현재 중간태 분사형인데 마찬가지로 생선이 불 위에 놓여져 익고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독자들에게 생동감을 주기 위한 표현법이다(H.W.Smyth).
예수께선 시장기를 느끼고 있을 제자들을 위하여 이미 식사를 마련해 놓고 계셨다. 제자들은 그가 바로 예수이신 것조차 모르고 있던 시점부터 예수께선 떡과 고기를 마련해 두고 계셨던 것이다.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우리 주님의 모습은 자상한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해 놓으시는 모습이다. 신앙이란 이토록 섬세하게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신뢰하는 소망의 눈을 가지는 것이다.
2) 생선을 가져오라
(levgei aujtoi'" oJ jIhsou'", jEnevgkate ajpo; tw'n ojyarivwn w|n ejpiavsate nu'n.:레게이 아우토이스 호 예수스 에넹카테 아포 톤 옵사리온 혼 에피아사테 뉜: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0절)
레게이(levgei:가라사대)라는 현배적 표현은 고난받으실 때나 그 이후 부활하신 때나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예수의 말씀하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현재형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들은 지금도 역사하시는 주께서 그 당시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해야만 한다(W.Hendriksen).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잡게 해주신 분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 고기들 중 일부를 요구하시는 분도 바로 주님이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요구는 자신이 고기를 목기 위함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함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나 할 수 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우리는 주님께 드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요구는 다름아닌 바로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3) 가득 찬 물고기
(ajnevbh oun Sivmwn Pevtro" kai; ei{lkusen to; divktuon eij" th;n gh'n mesto;n ijcquvwn megavlwn eJkato;n penthvkonta triw'n::아네베 운 시몬 페트로스 카이 헤일퀴센 토 디크튀온 에이스 텐 겐 메스톤 이크뒤온 메갈론 헤카톤 펜테콘타 트리온: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라 일백쉰세 마리라, 11절)
아네베(ajnevbh:올라가서)는 '배로 올라가 안으로 들어가서'라는 의미이다(W.Bauer). 운(oun:그러므로)은 '예수께서 말씀하셨으므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베드로의 행동이 자신의 뜻에 따라서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에 의지해서 취해진 것임을 보여 주는 단어인 것이다.
본문은 물고기의 숫자를 정확히 기입하고 있다. 이렇게 정확한 수치까지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사건의 역사적 진실성을 증거해 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제자들에게 특히 사도 요한에게 얼마나 가슴 깊이 각인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기억,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 깊이 체험하는 신앙은 세파가 아무리 그 가슴을 흔들어도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된다.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자신의 체험과 마음속에 기억하기 때문이다.
요 21:12~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께선 당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똑같은 질문은 던지셨다. 이것은 그를 괴롭게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다시금 제자로서의 힘을 얻고 새로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의 질문은 비단 베드로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1. 떡과 생선을 주시는 예수(12-14절)
1) 예수와 제자들의 모습
(Deu'te ajristhvsate. oujdei;" de; ejtovlma tw'n maqhtw'n ejxetavsai aujtovn, Su; tiv" ei_ eijdovte" o{ti oJ kuvriov" ejstin.:듀테 아리스테사테…데 에톨마 톤 마데톤 엑세타사이 아우톤 쉬 티스 에이 에이도테스 호티 호 퀴리오스 에스틴: 와서 조반을 먹으라…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2절)
아리스테사테(ajristhvsate:조반을 먹으리)는 명령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의 명령은 엄한 명령이 아니라 부드러운 권고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식사를 제공하고 있는 이 사람을 향하여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감히 는'(ejtovlma:에톨마)란 톨마오(tolmavw:감히 하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본문에서는 그들이 감히 지속적으로 묻지 못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이분이 바로 '그 주님'(oJ kuvriov":호 퀴리오스)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제자들의 머리 속에선 예수와 함께 식사하던 일은 물론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이다(Chrysostom).
본문은 놀라운 최초의 향연을 보여 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하는 하늘나라의 잔치상이 제자들에게 펼쳐진 것이다. 주님이 친히 요리하셔서 제자들을 향하여 식사를 권하고 계신다. 이와 같이 예수와 함께하는 놀랍고도 축복스런 식탁을 우리도 장차 저 하늘나라에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 떡과 생선을 주심
(e[rcetai jIhsou'" kai; lambavnei to;n a[rton kai; divdwsin aujtoi'", kai; to; ojyavrion oJmoivw".:에르케타이 예수스 카이 람바네이 톤 아르톤 카이 디도신 아우토이스 카이 토 옵사리온 호모이오스: 예수께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과 같이 하시니라, 13절)
에르케타이(e[rcetai:가셔서)는 '앞으로 나아가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제자들은 아마도 두려움 때문에 활발히 움직이거나 예수 옆으로 이동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친히 움직이신 것이다. 또한 람바네이(lambavnei:가져다가)와 디도신(divdwsin:주시고)은 둘 다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과거의 사건을 생생히 묘사하려는 역사적 현재형이다(H.W.Smyth).
본문에서 행동의 주체는 제자들이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한 이후 처음으로 다시 예수께서 식사를 대접하는 주인처럼 주재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께선 식사를 준비하셨을 뿐 아니라 끝까지 대접하시는 자세를 보여 주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 온유와 겸손함을 아직도 제자들 앞에서 몸소 실천해 보여 주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자상함과 겸손함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히 추구해야 할 푯대일 것이다.
3) 세 번째 나타나심
(tou'to h[dh trivton ejfanerwvqh jIhsou'" toi'" maqhtai'" ejgerqei;" ejk nekrw'n.:투토 에데 트리톤 에파네로데 예수스 토이스 마데타이스 에게르 데이스 에크 네크론: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4절)
개역성경에는 원문의 에데(h[dh:이미)를 적절히 번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단어가 사용됨으로써 예수의 현현을 당연시하면서도 강조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게르데이스(ejgerqei;":살아나신)는 수동태로 사용되어, 즉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부활시켰다는 용법으로서 예수의 능력이 예수 자신을 살려내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H.W.Smyth).
예수께선 본문의 나타나심까지 합하여 제자들에게만 세 번 나타나셨다(요20:19,26). 그러나 이미 막달라 마리아에게와 여인의 무리들에게 그리고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네 번 더 나타나셨음을 성경은 기록한다(A.T.Robertson). 본문이 특별히 '제자들에게'라는 말을 부연한 것은 이와 같은 여러 번의 나타내심을 고려하면서 기술한 결과일 것이다.
2. 반복적인 예수의 질문(15,16절)
1) 예수의 질문
( {Ote oun hjrivsthsan levgei tw'/ Sivmwni Pevtrw/ oJ jIhsou'", Sivmwn jIwavnnou, ajgapa'/" me plevon touvtwn:호테 운 에리스테산 레게이 토 시모니 페트로 호 예수스 시몬 요안누 아가파스 메 플래온 투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15a절)
플레온(plevon :더)은 정도를 비교하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고 양을 비교하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본문에서는 총체적 측면에서 '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Liddle & Scott). 투톤(touvtwn:이 사람들)은 옆에 있던 다른 제자들을 의미한다. 이렇듯 예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라는 말을 첨가해서 물어보신 것에는, 예수를 부인하기 이전에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부인해도 자신을 예수를 끝까지 좇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말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W.Hendriksen).
예수께선 베드로와 우리들에게 단순한 사랑을 청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사랑'을 당신께 보여드리기를 원하고 계신다. 한편 '요한의 아들 시몬'이란 예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부르셨던 본이름이다(요1:42).
2) 베드로의 대답과 주님의 명령
(levgei aujtw'/, Naiv, kuvrie, su; oida" o{ti filw' se. levgei aujtw'/, Bovske ta; ajrniva mou.:레게이 아우토 나이 퀴리에 쉬 오이다스 호티 필로 세 레게이 아우토 보스케 타 아르니아 무: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b절)
베드로는 예수를 향하여 퀴리에(kuvrie:주여)라고 부르고 있다. 이 단어를 통해 예수가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 되신다는 고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오이다스(oida":아시나이다)는 초경험적 직관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W.Bauer). 보스케(Bovske:먹이라)는 어린 짐승에게 우유를 빨게 하는 행동을 묘사한다(Liddle & Scott).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여! 바로 '당신께서'(su;:쉬) 아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의 질문을 들었을 때에 자신이 예수와 다른 제자들 앞에서 호언장담했던 일들과 부끄럽게도 믿음을 저버리고 예수를 부인했던 일들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당신이 아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께선 "이제 갓 태어난 나의 어린 양들을 먹이라"는 명령을 하심으로써 새로운 사명을 맡겨 주고 계신다.
3) 두 번째 질문과 대답
(levgei aujtw'/ Naiv, kuvrie, su; oida" o{ti filw' se. levgei aujtw'/, Poivmaine ta; provbatav mou.:레게이 아우토 나이 퀴리에 쉬 오이다스 호티 필로 세 레게이 아우토 포이마이네 타 프로바타 무: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6절)
두 번째 질문에선 비교의 대상 없이 직접 물어 보셨다. 예수는 첫 번째처럼 아가파스(ajgapa'":사랑하느냐)라는 동사로 질문하셨고, 베드로도 앞과 동일하게 필로(filw':사랑하나이다)를 사용하여 대답했다. 이 두 동사는 공통적으로 현재형이 사용되었다. 즉 예수께서도 과거에도 사랑했는지 확인하면서 책임 추궁을 하시는 것이며, 베드로도 지난날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지금' 예수를 사랑하고 있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포이마이네(Poivmaine:치라)는 어느 정도 자란 새끼를 길러내는 것을 의미한다(W.Bauer). 그러므로 이 단어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명령의 내용이 어느 절도 성숙했음을 보여 준다. 두 번씩이나 반복된 질문을 통해 예수께선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셨고 그에게 다시금 자신의 교회를 맡기는 중차대한 사명을 맡기신 것이다.
3. 세 번째 예수의 질문(17절)
1) 예수의 마지막 질문
(levgei aujtw'/ to; trivton, Sivmwn jIwavnnou, filei'" me:레게이 아우토 토 트리몬 시몬 요안누 필레이스 메: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17a절)
유대교에서 3은 하나님의 수로서 절대적 성격을 나타낸다(Lightfoot). 그러므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신 것은 완전한 사랑을 확인하고 사명을 확실히 인식시켜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W.Hendeiksen). 또한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세 번에 걸친 질문은 베드로의 죄책감을 완전히 씻어 주며 새로운 신앙의 출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세 번째 질문도 내용은 변함이 없으나 다만 동사가 아가파스(ajgapa'")에서 필레이스(filei'":사랑하느냐)로 바뀌어 있다. 보편적으로는 아가파오(ajgapa'w:사랑하다)가 이성적이고 지고한 정신적 사랑을 의미하는 한편, 필로(filei'":사랑하다)는 친구 사이의 돈독한 우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큰 차이가 없다는 입장(J.Moffatt, J.H.Bernarsd)과, 의미 차이가 존재한다는 입장(J.A.Bengel, B.F.Westcott)이 있다.
2) 근심하는 베드로
(ejluphvqh oJ Pevtro" o{ti eipen aujtw'/ to; trivton, Filei'" me:엘뤼페데 호 페트로스 호티 에이펜 아우토 토 트리톤 필레이스 메: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17b절)
엘뤼페데(ejluphvqh:근심하여)는 부정과거 수동형으로서 '근심되어'이며 '마음을 자르다'라는 의미로서 정신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단어이다(Liddle & Scott).
베드로는 예수께서 세 번째 질문을 던지셨을 때 멈칫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주님께서 왜 세 번씩이나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계신지 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번엔 예수께서 사용하신 단어조차도 자신이 대답했던 단어로 바뀌어 있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의 질문은 아가파오(ajgapa'w:사랑하다)는 그만두고라도, 네가 나를 필레오(Filei'":사랑하고 있다)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필레오(filevw)라고 하고 있느냐?로 들렸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베드로의 마음속에 혼란과 근심을 가져오기 충분했을 것이다.
3) 예수의 마지막 명령
(kai; levgei aujtw'/, Kuvrie, pavnta su; oida", su; ginwvskei" o{ti filw' se. levgei aujtw'/ 팷J jIhsou'"?, Bovske ta; provbatav mou.:카이 레게이 아우토 퀴리에 판타 쉬 오이다스 쉬 기노스케이스 호티 필로 세 레게이 아우토 [호 예수스] 보스케 타 프로바타 무: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7c절)
베드로는 세 번째 대답에서 판타(pavnta:모든 것을)라는 말을 덧붙여 대답하였다. 주 앞에서 내가 거짓을 아뢸 수 없다는 말 이외에는 아무런 대답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기노스케이스(ginwvskei":아시나이다)는 경험을 통한 지식을 의미한다(W.Bauer). 즉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다녔던 삶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을 주께서 알고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베드로는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넘어선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과거의 일들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사람에게, 예수와 함께 했던 생활들을 신앙 간증으로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베드로는 과거를 사랑의 기억으로 되새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은 이로써 끝을 맺게 되며 예수께선 그에게 세 번에 걸친 다짐을 통해 새로운 사명을 부과하셨음을 본문은 보여 주고 있다,
요 21:18~25 제자들의 앞날
예수께선 목자의 사명을 베드로에게 맡겨 주신 이후에 그의 삶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은 단순한 역사 서술로서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주님의 충성스런 제자가 되도록 믿음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믿음과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1.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예언(18-20절)
1) 베드로의 앞날을 말씀하시는 예수
(o{tan de; ghravsh/", ejktenei'" ta;" cei'rav" sou, kai; a[llo" se zwvsei kai; oi[sei o{pou ouj qevlei".:호탄 데 게라세스 에크 테네이스 타스 케이라스 수 카이 알로스 세 조세이 카이 오이세이 호푸 우 델레이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8절)
아멘 아멘 레고(ajmh;n ajmh;n levgw: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는 예수만의 고유한 선포 내용을 기록할 때 사용하는 독특한 도입 구문으로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J.Jeremias). 또한 본문의 앞 부분에는 뒤의 데(de;:그러나)와 상응하는 멘(mevn:한편)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해석에 주어야 한다. 본문의 구조는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를 대칭적으로 그리고 내용상 대조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H.W.Smyth).에존뉘에스(ejzwvnnue":띠 띠고)는 습관적 행동을 표시하는 미완료 과거형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베드로가 젊은 시절 활동적으로 다양하게 전도 여행을 다녔음을 암묵적으로 보여 준다. 예수께선 베드로에게 자신의 교회를 먹이라고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베드로의 일생이 어떠할 것인지를 이미 다 알고 말씀해 주셨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이 친히 그 앞길을 책임지시겠다는 함축적 의미를 포함하실 것이다. 예수께선 신자들에게 삶의 목적을 제시하실 뿐 아미라 과정까지도 알고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2) 예수가 하신 말씀의 의미
(tou'to de; eipen shmaivnwn poivw/ qanavtw/ doxavsei to;n qeovn. kai; tou'to eijpw;n levgei aujtw'/, jAkolouvqei moi.:투토 데 에이펜 세마이논 포이오 다나토 독사세이 톤 데온 카이 투토 에이폰 레게이 아우토 아콜루데이 모이: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19절)
포이도 다나토(poivw/ qanavtw:어떠한 죽음으로)는 '어떤 방법에 의한 죽음으로'라는 의미이다(H.W.Smyth). '어떠한 죽음으로'는 사도 요한이 베드로보다 분명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목도한 후에 증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하는데 본문의 이 구절은 베드로의 순교자적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콜루데이 모이( jAkolouvqei moi:나를 따르라)의 의미에 대해서, ①문자적으로 지금 일어나 따라오라는 뜻(Tholuck, Weiss, Bernard)으로 보는 견해와, ②십자가에서의 순교적 죽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Luther, Meyer)의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신 후에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바로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이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사도적 명령 이후에 나온 것임을 우리는 주목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그분이 맡기신 어린 양을 먹이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예수를 좇아야만 한다.
3) 베드로가 요한을 봄
( jEpistrafei;" oJ Pevtro" blevpei to;n maqhth;n o}n hjgavpa oJ jIhsou'" ajkolouqou'nta:에피스트라페이스 호 페트로스 블레페이 톤 마데텐 혼 아가파 호 예수스 아콜루둔타: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20절)
에피스트라페이스( jEpistrafei;":돌이켜)는 수동형 분사로서 갑작스럽게 뒤로 돌아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H.W.Smyth).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기 위해서 요한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본인을 지칭하고 있다(G.Machen).
따라오라는 예수의 말씀에 비단 베드로만이 응답했던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도 예수를 따랐음을 본문은 보여 준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지칭하여 기록하면서 성만찬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은연 중 예수를 따르는 일이 그분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의미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베드로나 사도 요한만이 해야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우리들도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다.
2. 요한에 대한 예수의 언급(21-23절)
1) 요한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
(tou'ton oun ijdw;n oJ Pevtro" levgei tw'/ jIhsou', Kuvrie, ou|to" de; tiv_:투툰 운 이돈 호 페트로스 레게이 토 예수 퀴리에 후토스 데 티: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1절)
퀴리에(Kuvrie:주여)는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본문을 통해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호칭이다. 이 단어는 단순하게 상급자를 향한 존칭으로 사용될 수도 있으며, 전쟁 포로로 잡혀온 노예가 자신의 주인을 향하여 부르는 호칭일 수도 있다. 또한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의미는 자신의 생명을 책임지시는 주님을 대하는 호칭으로서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적 호칭으로 사용되었다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TDNT). 후토스 데 티(ou|to" de; ti: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그렇다면 이 사람은…무엇이'이다. 자신의 삶의 방법과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베드로는 사도 요한의 장래에 관해서도 그가 무엇이 될것인지 궁금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베드로는 아마도 두 사람의 깊은 우정 때문에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물어 보았을 것이다(A.Piummer, F.L.Godet).
2) 예수의 말씀하심
( jEa;n aujto;n qevlw mevnein e{w" e[rcomai, tiv pro;" sev_ suv moi ajkolouvqei.:에안 아우톤 델로 메네인 헤오스 에르코마이티 프로스 세 쉬모이 아콜루데이: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2절)
에르코마이(e[rcomai:올)는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사건을 의미한다. 사도 요한은 본문을 기록하면서 재림을 고대하는 당시의 교회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에르코미아(e[rcomai)는 파루시아(parousiva:임재, 재림)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선 요한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베드로가 관여할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못박고 계신다. 다만 다시 한번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심으로써 베드로에게 하고 계신 명령이 무엇인지를 다시 강조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신앙인 각 개인은 나름대로의 사명이 있으며,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다른 신앙인과 견주어 판단할 필요도 없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진 일들에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맡겨 주신 주님의 일들을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J.H.Bernard).
3) 이 말씀의 의미
(ejxh'lqen oun ou|to" oJ lovgo" eij" tou;" ajdelfou;" o{ti oJ maqhth;" ejkei'no" oujk ajpoqnhv/skei. oujk eipen de; aujtw'/ oJ jIhsou'" o{ti oujk ajpoqnhv/skei:엑셀렌 운 후토스 호 로고스 에이스 투스 아델푸스 호티 호 마데테스 에케이노스 우크 아포드네스케이 우크 에이펜 데 아우코 호 예수스 호티 우크 아포드네스케이: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23절)
아델푸스(ajdelfou;":형제들)는 분명 골육친척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요한을 제외한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과 주님을 섬기는 한몸 된 교회의 지체들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셨다(A.Piummer).
아포드네스케이(ajpoqnhv/skei:죽지)는 질병이나 사고, 혹은 나이가 들어서 자연사하는 죽음을 지칭한다(Liddle & Scott). 사도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다른 제자들이 순교했던 것과는 달리 자연적인 죽음에조차도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오해되어졌음을 보여 준다. 본문을 사도 요한이 기록한 이유는 아마도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 그리도 교회의 형제들이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물론 사도들 중 가장 오래 산 사람이었으며 순교하지 않은 예수의 유일한 제자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그가 불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할 것이다.
3. 결론(24,25절)
1) 그 제자의 증거
(Ou|tov" ejstin oJ maqhth;" oJ marturw'n peri; touvtwn kai; oJ gravya" tau'ta:후토스 에스틴 호 마데테스 호 마르튀론 페리 투톤 카이 호 스랍사스 타우다: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24a절)
호 마데테스(oJ maqhth;":제자)는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 제자'로 해석해야만 한다. 본문은 이렇듯 정관사를 사용함으로써 본서를 기록한 사람을 명확하게 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투톤(touvtwn:이 일)은 복수 형태로서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건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H.W.Smyth).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이 일'은 21장의 사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서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Dods).
2) 제자의 증거의 참됨
(kai; oi[damen o{ti ajlhqh;" aujtou' hJ marturiva ejstivn.:카이 오이다멘 호티 알레데스 아우투 헤 마르튀리아 에스틴: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오나, 24b절)
오이다멘(oi[damen:제자)은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였다. '나는 아노라'를 대신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독자들도 함께 복음서 기자의 의도에 동의하고 기록 내용을 인정한가는 것을 함축한다. 또한 이런 표현을 통해 독자들과의 교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를 복음서 저자를 잘 알고 있는 그의 증거를 보증하는 일단의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을 요한이 오랜기간 동안 사역한 에베소의 장로들 무리일지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A.T.Roertson).
사도 요한은 바로 자신이 이 모든 일들을 직접 목도하였으며 자신의 증언과 기록들이 상상이나 전설이 아님을 '증거'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요한은 본문을 통하여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의 진정성과 역사성을 보장하고자 의도했던 것이다(J.H.Bernard, A.Plummer).
3) 수많은 예수의 행적
(a{tina eja;n gravfhtai kaq j e{n, oujd j aujto;n oimai to;n kovsmon cwrh'sai ta; grafovmena bibliva.:하이나 에안 그라페타이 카드 헨 우드 아우톤 톤 코스몬 커레사이 타 그라포메나 비블리아: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25절)
톤 코스몬(to;n kovsmon:이 세상)에서 사용된 코스몬(kovsmon)는 '질서, 장신구, 지구, 우주'등의 뜻을 지닌다. 본문에서는 정관사가 사용되어 오직 하나뿐인 어떤 존재를 지칭하고 있으므로 '온 우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W.Bauer).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을 일일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도 그 모두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세상이며 그분은 이 세상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이 너무나 많고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본문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기록이 완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힘으로서 다른 제자들의 기록들인 공관복음서의 내용들과 여타의 문헌적 기록들의 진실성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