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파스(Herod Antipas,주전4-주후39)Herod Antipas, 4 BC-40 AD,
안티파스(Herod Antipas,주전4-주후39)Herod Antipas, 4 BC-40 AD,
Herod Antipas, 4 BC-40 AD,
?
세례 요한을 처형한 왕 헤롯 대왕의 둘째 아들로 헤롯이 죽자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 되어 BC 4-AD 39년까지 다스렸다(눅 3:1). 성경에는 분봉왕 헤롯, 헤롯왕으로 나온다(마 14:1; 막 6:14; 눅 3:19). 그는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의 이복형제인 빌립(헤롯 2세)의 아내이자 자신의 조카인 헤로디아와 다시 결혼하였다. 이것 때문에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게 되자(막 6:18) 그는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막 6:17). 헤롯은 세례 요한을 두려워하여 죽이지 못하다가 생일잔치 자리에서 헤로디아의 딸(살로메)의 요청을 듣고 세례 요한의 목을 베고 말았다(막 6:20-29).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여우라는 말을 들었는데(눅 13:32) 이는 협박과 속임수에 능한 헤롯의 간사함과 교활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헤롯은 빌라도에 의해 호송되어온 예수님을 재판하였는데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한 후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눅 23:7-11). 그는 갈릴리 해안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의 이름을 따라 디베랴라는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갈릴리 바다도 디베랴 바다라고 불렀다.
안티파스(Herod Antipas,주전4-주후39)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형 아켈라오와 마찬가지로 헤롯왕과 그의 사마리아인의 처 말타스(Malthace)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그의 사마리아인 모계 혈통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를 더 싫어하였다. 갈릴리와 베뢰아의 두 지역이 그에게 주어진 이유는 아켈라오와 세력 균형을 유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일부는 비옥했고, 다른 부분은 개발 가능한 지역이었다. 특히 갈릴리는 인구가 조밀했고 무역과 어업이 번창하였다.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 왕으로서 안티파스의 통치는 그의 형 아켈라오에 비하여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참을 만하였다. 그는 대규모의 건축을 실시하였고 그의 국방을 견고케 하였다. 안티파스는 유대인의 종교를 존중하려고 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축제에도 나타났고 사람 형상이 없는 동전도 발행했으며, 유대 총독 빌라도가 헤롯의 예루살렘 궁전에 황제의 이름을 쓴 금 현판을 두려고 했을 때 반대하였다. 그는 중용의 길을 택하여 어떠한 동요도 없이 30년 동안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는 신약에서 특별히 세례 요한과 관련하여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엄격한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헤로디아와 그의 불법적인 결혼은 그의 간음죄를 지적하였기 때문에 투옥시킨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저 여우’(악하고 간교하며, 참된 힘과 위엄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라고 했다.
이 헤롯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성금요일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헤롯과 동일인이었다(눅 23:7-12).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설득을 받아 그녀와 함께 로마에 가서 칼리굴라(Caligula, 주후 37-41)에게 왕의 칭호를 제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의 청원을 수락받지 못하고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헤로디아와 함께 추방 당하였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형제를 시기한 헤로디아를 심판하셨고, 쓸데없는 여인의 수다를 들은 헤롯 또한 심판하셨다.”
yydeokk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