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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창

고통에는 뜻이 있다

by 은총가득 2020. 9. 2.

 

 

고통에는 뜻이 있다.

 

1. 사람들은 고통이 찾아오면 당황한다.

"왜 나인가?" 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자학을 한다. 또는 타인에게서 " 당신의 죄 때문이다. " 라는 화살을 맞고 비틀거린다. 그런데 이것들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치유가 아닌 덧이 나게 하는 것이다.

 

2. 그래서 자학보다 더 필요한 것은 자기정체성이다.

"왜 나인가?" 라는 질문보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질문해야 고통의 광야에서 살아 남는다. 고난의 긴 터널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3. 고통의 광야를 지날 때 우리는 최대한 우리 자신을 단순하게 해야 한다.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를 다 제해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할지라도 필수품이 아니라면 다 던져 버려야 한다, 그래서 최대한 가볍게 해야 한다. 영적노마드가 되어야 한다. 단순해지면 소중한 것이 보인다. 단순해질수록 소중한 것만 남는다.

 

4. 그런 면에서 고통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려놓음, 더 내려 놓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아 안다.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나를 포기하는 순간 경험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자기부인의 터널을 통과하는 그때에 경험하곤 한다.

 

5. 신약성경에서 시간을 뜻하는 단어는 2가지가 사용 된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이다.

 

6.크로노스는 시계이다.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이다. 나의 평범한 일상이 크로노스이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는 시간이다. 하늘의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바로 그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내가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손길이 빚어가시는 시간이다.

 

7. 카아로스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무의미하게 보이고 고생길이라고 생각되고 고통의 눈물이 쌓여서 오랜 시간을 고통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일상의 축적된 묵상과 기도일 것이다.

 

8. 평범해 보이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소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서 한걸음씩 믿음의 행보를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포기하거나 주저 앉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걸음을 옮겨야 한다.

 

9. 요셉에게 그 시간은 형제에게 팔려 노예로 보내고 믿었던 주인에게 배신 당하고 억울한 모함을 받아 죄수로서 보낸 13년이었다. 모세에게 그 시간은 동족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그 일이 탄로나서 도망자로 살았던 40년의 광야 생활이었다. 다윗에게 그 시간은 장인 사울에 의해 쫓겨다닌 광야를 유리방황한 13년의 시간이었다.

 

10. 이것이 숙성 시키는 시간이요 실상은 카이로스의 재료가 돠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무의미하기 낭비하면 썩는 시간이 되고 이 고통의 시간에 주와 동행을 선택하고 집중하고 반복하면 숙성되어 하나님이 쓰시기에 편한 사람이 된다.

 

11.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썩는 시간이 아닌 발효되어 숙성되는 시간을 살아간 사람들이다. 기나긴 기다림에서, 육체적 정서적 영적 병과의 싸움에서, 좌절된 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싸매시고 치유시키시고 다시 세우실 것이다. 역전이 기다리고 있다.

 

12. 고통의 시간에 주님 앞에 머물라. 인생의 신비가 일어난다. 인생의 패러독스 즉 역설적 진리를 경험한다. 그때에 카이로스를 경험한다. 우리는 카이로스를 원하지만 우리의 고통의 문제를 하나님께 연결하고 주안에 머뭄의 시간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조금만 계획에서 벗어나면 조바심이 난다. 그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13. 그때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곤 한다. 아브라함의 카이로스는 이삭을 데리고 떠날 때가 아니다. 단 둘만 산으로 향할 때도 아니다. 제단에 묶었을 때도 아니다. 칼로 내려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여호와 이레는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드러난다.

 

14. 내 편에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막연하다. 막막하다. 두렵다. 불안하다. 초조하다. 그러나 단지 그 말씀이 있기에 순종할 뿐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미리 다 준비하고 계셨다.

 

15. 고통 속에서 불안한가? 기다림이 길어지면서 지치고 힘든가? 그때가 더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할 때이다. 그때가 더 하나님의 어루만지시는 손길을 갈망해야 할 때이다. 그때가 주 앞에서 울어야 할 때이다. In His Time!

광야를 지나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중보하고 응원하며

 

 

 

 

고통의 문제가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1. 사람들은 작은 고통을 당하면 사람들을 찾습니다.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작은 위로를 줍니다.

 

2. 그런데 사람들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고통이 찾아오면 사람들을 피하게 됩니다.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하나 둘 떠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함께 길고 지루한 시간들을 버틸 힘과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큰 고통의 문제가 있을 때 사람을 피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받는 상처와 상실의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위로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고통을 모른다고 느껴지기에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3. 그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 괴로움과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의 시선은 따갑습니다.

그래서 더 아픈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을 이해하시는 분은 우리를 지으신 분밖에는 없습니다.

 

4.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 렘애2:24 고통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5. 사실 고통 가운데 우리를 무너지게 하는 것은 고통보다는 고통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6. 두려움과 불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좌절이 되고 낙심이 되고 자포자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서면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새로운 길이 보입니다. 역전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격과 영성이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는 은혜를 경험하여 알게 됩니다.

 

7.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설 수 있습니까?

 

8. 시편 42:5절에 다윗의 기도에 그 비밀이 보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예레미야도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 렘애2:24

 

9. 낙망과 불안을 넘어서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얼굴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0. 광야에 가면 싯딤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살기 위해 수십미터 깊이로 뿌리를 내립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오직 한분께만 깊이 뿌리 내리지 않으면 결국 고통의 가뭄 속에서 메말라 죽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부인하고 떠나기도 합니다. 또 남을 함부로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싯딤나무처럼 하나님께만 깊이 뿌리를 내린다면 고통에는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글: 이상갑목사. 고통의 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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